윤여정 '재일 한국인 인종차별' 장면 찍다 미드 감독이 울었다
뉴욕 시사회서 관객들 눈물도
"중동서 30년 군인 생활, 전쟁 트라우마 위로"
"엉터리 일본어를 못 알아들은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지난 23일 공개된 애플TV플러스 드라마 '파친코' 시즌2 1화에서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재일 한국인 선자는 주문을 잘못 받은 빵 가게 일본인 직원한테 오히려 이렇게 면박을 받는다. 시대적 배경은 1989년 일본 도쿄. "우리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데 가세요. 당신(재일 한국인) 같은 사람들이 가는 가게 있잖아요." 재일 한국인을 향한 일본인의 인종차별에 선자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 잘못이라 생각, 분노할 힘 없어" 윤여정이 표현한 '이민자 무력감'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부산 한 어촌에서 태어난 선자는 194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멸시에도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참는 데 이력이 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할머니 대신 화를 내는 손자 솔로몬(진하)을 진정시키는 것뿐이다. 영국 감독 리안 웰햄은 이 장면을 찍은 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인종차별을 당해) 화내는 손자와 그걸 말리는 할머니를 보면서 감독이 촬영장에서 '대본을 읽을 땐 슬프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고 하더라고요. 그 장면을 영어 대사로만 봤을 때 영국 감독은 (그 서러움을) 우리처럼 느끼진 못했겠죠." 윤여정의 말이다. 그는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 직후인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혼 후 1985년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10년 넘게 낯선 땅에서 살았다. "선자는 (일본)말을 못 알아듣는 걸로 쭉 차별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람이 움츠러들게 돼요. 내 잘못이라 생각하게 되고요. 너무 겁나고 분노할 힘이 없어지죠." 이민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윤여정이 인종차별을 당한 선자의 무력감을 연기한 배경이다. 1910~80년대 일본과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이민자 가족의 4대에 걸친 삶의 분투를 그린 '파친코'에서 윤여정은 늙은 선자를, 김민하는 젊은 선자를 각각 연기했다.
'사과 마크' 미드에 한국 발효 음식 조명 사연
'파친코' 시즌2는 1945년 일본 오사카에서 선자가 어린 두 아들을 부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리어카를 끌고 시장에 나가 김치를 팔던 선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배추 공급이 뚝 끊기자 막걸리를 만들어 암시장에 내놓는다. 카메라는 선자가 쌀을 씻어 고두밥을 쪄낸 뒤 항아리에 누룩과 물을 섞어 술을 발효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상에 사과마크('애플' 로고)를 단 '파친코' 시리즈는 100% 미국 자본(애플TV플러스)으로 제작됐다. 재일 한국인이 온갖 핍박에도 한국 전통 발효 음식을 만들어 일본에서 강인하게 살아남은 모습을 조명하는 미국 드라마라니. 극엔 한국의 민요 '한오백년'도 절절하게 흐른다. 이런 한국적 장면은 제작 총괄과 각본(재미동포 수 휴) 그리고 연출(재일동포 이상일·6~8회) 등에 한국계 창작자들이 여럿 참여해 가능했다. 23일 서울 강남 소재 한 호텔에서 만난 김민하는 "이상일 감독님께 촬영 때 '(연기가 어려워 고민하는) 절 포기하지 말라'고 농담을 했는데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 절대 손을 놓지 않겠다'고 하더라"며 "정말 울컥했다"고 촬영 뒷얘기를 들려줬다.
선자는 일본에서 자라고 미국으로 유학 간 손자에게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라"라고 당부한다. 나라를 잃었던 유랑의 후예들의 아픔과 정체성에 대한 환기는 세계 이민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파친코' 시리즈에서 선자의 첫사랑 한수를 연기한 이민호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시즌2 시사회에서 중동 지역에서 군인으로 30년 동안 산 관객이 왔는데 '전쟁 후유증으로 트라우마가 컸는데 이 드라마로 위로를 받았다'고 하더라"며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분들이 많았다"고 현장 분위기를 들려줬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즌2에선 일본의 전쟁 범죄 문제도 현재진행형으로 다뤄진다.
일제강점기 겪은 '90대 친할머니'가 연기 선생님
시즌2는 1화 공개 하루 뒤인 24일 기준 한국을 비롯해 일본, 싱가포르 등에서 시리즈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외신 반응도 일단 호의적이다. "영화 '조이 럭 클럽'처럼 우리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월스트리트저널)라거나 "과거(사)는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눈물겨운 여정"(버라이어티)이란 호평이 잇따라 나왔다.
시즌2에서 도드라지는 건 전쟁 속 가족의 생계를 도맡은 선자의 강인함이다. 20대 배우 김민하의 단단한 연기는 실패를 거듭하고 일어선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다. 그는 한국에서 6~7년 동안 번번이 떨어진 오디션 영상이 우연히 '파친코' 시리즈 캐스팅 디렉터 눈에 띄면서 출연 기회를 잡았다. 코로나19로 미국 연기 유학길마저 막혀 "난 이것도 안 되나 보다"라고 낙심했을 때 찾아온 행운이었다. 넉 달의 오디션을 거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그는 일제강점기를 몸소 겪은 90대 친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그 시대를 이해하려 애썼다. 김민하는 "할머니는 (그 시절) 생각도 하기 싫다고, 연기여도 (당시 고통을 겪어) 힘들어할까 봐 처음엔 제가 이 드라마 출연을 안 하길 바라셨다"며 "'그 시절 일곱 남매를 어떻게 키우셨어요'라고 묻고 '그냥 했지'라고 답한 할머니의 무조건적 사랑을 떠올리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8부작으로 제작된 시즌2는 10월 11일까지 매주 금요일에 한 회씩 공개된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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