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이재용, 삼성 위기 돌파할 수 있을까
더위도 식힐 겸 말이 통하는 친구들과 만나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벌이 화제가 되었는데 한 친구가 뜻밖에 현대의 정의선 회장을 칭찬하며 나더러 정의선이 양궁 6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연설을 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웃으며 대체로 이 칭찬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요즘 현대차의 실적이 질주하듯 잘 나가고 있는 탓도 있을 테다.
정의선 회장의 연설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공정하게 경쟁했는데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도 괜찮다. 보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품격과 여유를 잃지 않는 진정한 1인자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의 품격을 높이고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안겨드릴 수 있다.” 이게 정말 한국의 재벌총수가 한 말이 맞나. 좋은 연설이다. 하지만 양궁협회 회장으로서 보여준 스포츠 분야의 윤리감이 현대차의 사내하청노동자나 다단계 협력업체 노동자들까지 포괄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가운데 이재용 회장이 이끌고 있는 삼성의 위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그룹 시총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삼성은 현재 다중 위기에 빠져 있다.
첫째, 사법적 위기다. 이재용 회장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위한 뇌물공여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확정받아 수감 생활을 한 바 있다. 또 합병 과정에서 제일모직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삼성바이오 분식회계(회계조작)를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재용 회장의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을 규명할 핵심 관건으로 지목된 삼성바이오의 분식회계 사건은 현재 2심을 앞두고 있다.
둘째, 경쟁력 위기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시대 HBM(고대역폭메모리) 개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SK하이닉스에 선두를 내주었다. AI 컴퓨팅의 주도자 엔비디아는 최신 제품에 SK하이닉스 HBM을 채택했고 삼성전자는 밀려났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1위 티에스엠시(TSMC)와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삼성전자가 올 하반기 HBM 공급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고, 미국 엔비디아 퀄테스트(품질검증) 통과 및 대량 출하에 대한 시장의 기대감이 커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셋째, 노사불화의 위기다. 삼성의 총수 일가는 오랜 세월 동안 ‘무노조 경영’ 방침을 고수하면서 직원들의 노조 설립과 활동을 방해했다. 이를 위해 어용노조까지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조합원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노조(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가 설립됐으면 노조와 생산적으로 타협해 새 노사관계 정립에 앞장서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껏 삼성이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다.
넷째, 위 모두를 관통하는 위기가 있는데 바로 지도력의 위기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사건 이후 올해로 이재용 회장이 본격적으로 그룹경영을 맡은 지 10년이 됐다. 구속사태와 재판이 이어지는 사법 위기에 발목이 잡혀 총수로서 뚜렷한 경영 구상과 이렇다 할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의 사업 구조는 선대 회장이 일군 10년 전에 비해 얼마나 진일보했나. 혁신 없이 미래성장동력이 생길 수 없다.
올해 이재용 회장의 사법 위기 관련 두 개의 판결이 있었다. 지난 2월 법원은 1심 재판에서 이 회장의 ‘불법 승계’ 혐의를 모두 무죄로 판단하고 이 회장과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지난 14일 서울행정법원은 삼성바이오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회계처리 기준을 위반한 분식회계를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의 판결을 내렸다. 이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 1심 판결과 배치되는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선고와 관련해 보수언론들은 법원이 삼바에 대한 80억원 과징금처분을 취소한 부분을 부각시켰지만 정작 핵심은 회계부정을 인정한 것이다(참여연대 논평 참고). 이 판결은 삼성합병 2심 재판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권한과 책임은 비례한다. 이재용 회장도 예외일 수 없다. 그리고 제도정치권은 건망증이 심한데 ‘기본사회’ 정책을 내건 이재명의 민주당도 국정농단이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불로소득자 세금 깎아주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국민연금이 재벌세습을 돕는 일등공신 노릇을 하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총수나 가문이 그룹을 사유물로 취급하지 못하게, 재벌이 이해당사자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게 연금거버넌스의 대안정책을 강구하기를 강력히 주문한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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