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블랙박스를 뚫고 나온 그녀 목소리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 협회나 구단과 빚는 갈등은 드물지만 터지면 대개 큰 스캔들이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딴 쇼트트랙 안현수 선수,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박태환 선수 모두 연맹이나 협회와의 갈등으로 선수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 금메달을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안현수 선수를 선배들이 구타했다는 것이 안 선수 부친의 증언이다. 감독 선임 문제, 포상금 문제 등으로 수영연맹에 미운 털이 박힌 박태환 선수는 훈련할 수영장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기까지 했다.
유명 스포츠 선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그만큼 치열한 노력과 함께 ‘운’이 필요하다. 손흥민 선수의 부친인 손웅정 씨가 아들에게 “성공에는 실력 못지않게 운도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실력이 있다고 모두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니 겸손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마지막 한 발로 결정되는 양궁의 슛 오프에서 대한민국은 5mm 차이로 금메달을 땄다. 실력에 운이 더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넓은 의미에서 운은 실력 외 나머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안현수 선수와 박태환 선수의 사례에 분노하는 이유는 어떤 외부적 힘이 실력을 이기는 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스포츠 선수들은 그 어떤 관계에서 ‘을’, 즉 약자이다. ‘갑’은 협회나 소속팀일 수도, 감독이나 코치, 혹은 선배일 수도 있다. 실력이 최우선이라는 사회적 믿음을 전제로 용인된 블랙박스에서 일어나는 갑을 관계이다. 을로서 선수들이 겪는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19년 미투 운동 당시 체육계 전반에서 터져 나왔던 폭로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처럼 블랙박스 속 을의 목소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때가 있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는 안세영 선수다. 금메달을 딴 배드민턴 국가대표 안 선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꿈을 이루기까지 자신의 원동력은 ‘분노’였고, 자신의 꿈은 ‘목소리’였다”고 말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꿈이 ‘목소리’였다는 사실에 필자는 깊은 슬픔과 동시에 강한 공감을 느꼈다. ‘배드민턴을 못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뚫고 블랙박스 밖으로 나온 목소리였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부른다. 스포츠 선수들의 목소리가 블랙박스를 뚫고 나오는 용기가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 가장 빛나는 순간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필자는 고 최동원 선수를 꼽는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던 최동원 선수는 198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둬 롯데를 우승시킨 무쇠팔. 그가 4년 후 1988년 9월 13일 대전 유성호텔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서 그는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창립을 선언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롯데는 그를 라이벌팀 삼성으로 트레이드했고, 끝내 재기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블랙박스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도 있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종목 고 최숙현 선수. 2020년 6월 그는 어머니에게 가해자들의 죄를 밝혀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숙소에서 몸을 던졌다. 그가 경주시청 철인3종 팀의 관계자들로부터 수 많은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것이 녹취록을 통해 밝혀졌다. 살아있을 때 대한체육회에 낸 진정도, 경찰 고소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그의 목소리는 헛되지 않았다. 유족이 최 선수의 사망을 업무상 재해라는 취지로 근로복지공단에 신재보험금을 요청했고, 2021년 4월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산재로 인정했다. 훈련 과정에서의 가혹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본 것이다. 스포츠 선수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협회와 구단, 감독과 코치는 선수를 위해, 나아가 선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선수의 역량 극대화, 공정한 경쟁은 물론, 선수 보호도 이들의 역할이다. 불행히도 그동안 체육계는 이 모든 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안세영 선수의 용기 있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더 많은 목소리가 블랙박스 밖으로 나오기를, 그리하여 더 이상 제2의 안현수, 최숙현이 나타나지 않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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