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럼] 흙에서 발견한 신약, 항생제와 면역억제제

정승규 약사 2024. 8. 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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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규 약사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흙이 물질을 구성하는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는 탈레스가 물을, 아낙시메네스가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이라고 말했는데 마지막으로 크세노파네스가 흙을 이야기함으로써 고대 4원소가 완성되었다.

오랫동안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 4원소는 근대에 와서 모두 부정되었다. 원소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입자를 말하는데 물은 산소와 수소로, 공기는 질소와 산소 등으로, 불은 고열의 플라즈마 상태로, 흙은 다양한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고 판명이 난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흙에 대한 애착이 유독 강하다. 수천 년간 이어진 농경 생활을 통해 흙이 작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1940년대 흙에 질병을 치료하는 물질이 숨어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결핵약 스트렙토마이신을 찾은 것이다. 스트렙토마이신의 등장으로 당시 만연한 불치병 결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사람이 페스트균으로 죽었는데 감염되면 피부가 검게 변한다고 해서 흑사병으로 불렀다. 그에 반해 결핵에 걸리면 피부가 새하얗게 변하기 백사병이라고 불렀다. 백사병의 공포에서 해방시켜준 스트렙토마이신은 흙에 있는 방선균이라는 미생물에서 나온다. 푸른곰팡이가 만드는 페니실린같이 미생물이 분비하는 물질로 다른 세균을 물리쳐 약효를 발휘한다.

황금알을 낳는 기적의 신약이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오자 제약회사들은 흙에 눈독을 들였다. 1946년 미국 미주리 대학에 있는 흙에서 황금빛의 오레오마이신이 발견되자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는 흙에서 항생제를 찾기 위해 뛰어들었다.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화이자는 당시 전 세계 토양 샘플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여행자 선교사 탐험가 항공기 승무원 학생 주부에게 사례금을 주고 전 세계의 흙을 수집했다. 브라질 오지의 정글, 산꼭대기, 땅속 깊은 광산, 사막, 외딴섬, 무덤 등지에서 채취된 흙은 포장되어 택배를 통해 연구실로 보내졌다. 10만 종류 이상의 샘플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흙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개발된 약이 테라마이신이다. 흙을 뜻하는 라틴어 테라(terra)를 사용해 항생제를 의미하는 마이신과 합쳐 테라마이신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테라마이신은 100종 이상의 많은 균을 죽일 수 있는데 세균뿐만 아니라 기생충같이 병을 일으키는 단세포 생물, 원충까지 죽이는 능력이 있어 눈의 감염 폐렴 매독 말라리아 등 다양한 감염증에 효능이 있다.

흙에서 잇따라 항생제가 발견되자 스위스 제약회사 산도스(현재는 노바티스로 합병되었음)도 노다지를 찾는 경쟁에 나섰다. 1972년 산도스 연구팀은 노르웨이에 있는 흙 속의 곰팡이가 생산한 물질로 항균 능력을 테스트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세균을 죽이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대신 면역세포인 림프구의 기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여기서 나온 약이 사이클로스포린인데 항생제를 찾다가 의도하지 않은 면역억제제를 찾은 것이다.

당시는 신장 간 심장 이식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이식 후 일어나는 면역반응을 줄이기 위해 혁신적인 약을 찾던 시기였다. 프레드니솔론 같은 스테로이드나 항암제 계통의 약이 있었지만, 신통치가 않았는데 사이클로스포린을 투여하자 18%에 불과하던 간 이식 성공률이 68%까지 올라갔다. 사이클로스포린 덕에 장기 이식 수술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며칠 전 유한양행이 개발한 폐암 치료제 렉라자가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렉라자는 폐암에 쓰는 표적항암제로 기존 약에 비해 사망률을 30%나 감소시킨 약이다. 스트렙토마이신, 사이클로스포린같이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신약을 속속 개발하고 있다. 지속적인 연구 투자로 신약 성공의 낭보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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