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지시로 ‘홀치기’ 특허 포기…법원 “유족에 이자까지 23억 배상하라”

장현은 기자 2024. 8. 2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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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 당시 정부의 불법 구금과 강요로 염색 기술 특허권을 포기해야 했던 발명가 유족에게 국가가 7억3천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최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재판장 이세라)는 특수염색 기법인 ‘홀치기’를 발명한 고 신아무개씨의 자녀 2명에게 국가가 총 7억3천만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들이 받을 돈은 총 23억6천여만원이다.

고 신씨는 1940년께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회사를 운영하다가 1960년 한국으로 귀국해 회사를 설립하고 1962년께부터 홀치기 가공업에 종사했다. 신씨는 이 기법을 발명한 뒤 1965년 발명특허등록을 하고, 의장등록을 했다. 10여개 기업이 신씨의 특허가 무효라며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했지만, 신씨는 1969년 대법원 판결로 특허권을 유지했다. 이후 신씨는 기술을 베낀 다른 업체들을 상대로 특허권 침해로 인한 부당이득반환청구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1966년 7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망인의 특허권이 인정되며, 그 기간 다른 기업들의 순이익을 바탕으로 계산한 5억2천만원을 신씨가 배상받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항소심이 진행되던 1972년 6월5일 신씨는 돌연 ‘손해배상청구 사건에 관해 그 권리 일체를 포기하고 소 전부를 취하한다’며 소송을 포기했다.

신씨가 소 취하서를 제출하게 된 배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 신씨는 1972년 5월31일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불법감금과 폭행을 당한 뒤 ‘오사카 세관장 명의의 증명서와 무임소장관 명의의 증명서를 허위로 발급받아 이를 소송에 증거로 제출해 승소하게 됐다’며 특허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신씨의 연행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 신씨의 연행 전날 박 전 대통령은 제5차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홀치기 수출조합 쪽의 ‘관련 민사소송 판결 때문에 업계가 마비돼 수출에 지장이 있다’라는 민원을 전달받았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이 상공부 장관에게 ‘문제를 왜 아직도 시정 못 했냐’고 질책했던 것이다.

2006년 신씨는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이 사건과 관련한 진실규명을 신청했지만 각하됐고, 2015년 사망했다. 이후 유족이 다시 과거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면서 작년 2월에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신씨는 과거 진실규명 신청 때 ‘수사관들이 국가를 위하여 홀치기 특허권과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거부하니 참나무 목봉으로 엉덩이와 허리를 구타해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런 일이 며칠 계속되었다’는 내용의 서면진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신씨가 1심에서 승소해 받기로 했던 5억2천여만원과 지연이자,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위자료 등을 고려해 총 배상액을 정했다. 재판부는 “신씨는 1972년 5월31일부터 1972년 6월5일까지 불법으로 체포·구금된 채 가족이나 변호인 등의 접견이 차단된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음을 인정할 수 있고, 이는 공무원들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또한 소취하 역시 “불법 체포·감금당한 상태에서 심리적·육체적으로 가혹 행위를 당해 의사에 반하여 이 사건 소취하서에 날인하게 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망인과 참고인들의 진술 내용이 대부분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과 모순되는 부분도 없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당시의 불법행위가 인정되더라도,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가 소멸하였다는 주장을 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또한 ‘부당이득반환채무를 부담한다고 해도, 기업의 영업이익 전부를 이 사건 특허권 침해로 인한 부당이득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정부 쪽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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