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광차밭과 ‘곶자왈’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한겨레 2024. 8. 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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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경관의 힘. 오설록 티뮤지엄에서 본 서광차밭 풍경.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바다를 건너 섬으로 떠나는 설렘, 일상과 다른 날씨와 경관을 만나는 기대. 제주도 여행은 늘 마음을 부풀게 한다. 화산섬의 이색적인 지질 환경과 아름다운 바다 풍경 못지않게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 명소로 부상한 곳이 있다. 연간 180만명 넘게 방문한다는 서귀포시 서광리의 ‘오설록 티뮤지엄’이다. 다양한 차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차 박물관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옆 건물 이니스프리 하우스에서는 제주산 원료로 만든 화장품을 쇼핑하며 유기농 브런치도 즐길 수 있다.

오설록 티뮤지엄의 더 큰 매력은 주변 녹차밭의 장쾌한 생산 경관이다. 24만평에 달하는 서광차밭은 멀리서 관조하며 그림처럼 감상하는 경관이 아니다. 제주 중산간의 기온, 토양 공극, 구름과 안개, 거친 바람에 힘입어 작동하는 생산의 경관이다. 고요한 풍경의 이면에서 땅과 날씨와 차나무와 노동이 뒤엉켜 역동한다. 방문객들도 자신의 신체와 감각으로 경관에 참여한다. 통창 너머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다. 차나무 사이를 걷고 찻잎을 만지고 냄새 맡으며 경관 속의 행위자가 된다. 환경미학 이론을 빌리자면, 참여(engagement)의 미적 경험이다.

야생의 곶자왈을 개간해 녹차밭의 역동적인 생산 경관을 만들어 냈다. 사진 배정한

이 광활한 차밭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국내 화장품 사업의 선구자인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회장(1924~2003)은 맥이 끊긴 차 문화를 되살리는 데 소명을 가지고 차나무 재배에 알맞은 땅을 오랫동안 찾았다. 차나무는 연평균 기온 섭씨 14도 이상, 연강우량 1600㎜ 이상에 배수가 잘되는 약산성 토양에서 자랄 수 있다. 이 까다로운 조건에 맞는 곳이 제주도 중산간이었다. 하지만 1979년 첫 삽을 뜬 도순 지역과 1983년 개간을 시작한 서광 지역은 불모의 황무지였다. 한라산 남서쪽 중턱의 도순은 아무도 손댄 적 없이 버려진 야생의 ‘도리솥당’이고, 서광은 땅 밑 깊숙한 곳까지 돌과 자갈이 덮여 있어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가시덤불과 양치류가 얼크러져 정글처럼 빽빽한 ‘곶자왈’이었다.

개간의 여정은 험난했다. 오지를 개척해 땅을 고르고 흙을 붓고 수백만본의 묘목을 심어도 땅 투기라는 오해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기는 물론 물도 없는 서광의 곶자왈.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끝도 알 수 없는 지하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갈 뿐이었다. 몇년에 걸쳐 손으로 일일이 돌을 골라내고 흙을 채우고 골을 켜서 묘목을 심어나갔다. 집념과 열정의 긴 시간이 흐르자 제주의 거친 자연이 녹차밭을 받아들였다. 완만한 경사지는 식물 에너지의 근원인 태양을 끌어안았고, 짙은 해무는 차 재배에 최적인 그늘을 제공했다. 토양의 공극은 유기물을 선물했고, 현무암의 미세한 틈은 차나무를 건강하게 자라게 했다. 역동하는 생산 경관이 직조된 것이다.

거친 곶자왈의 지형과 수목, 돌과 풀을 다시 받아들인 조경 설계. 사진 배정한

2001년 아모레퍼시픽은 서광차밭 한구석에 오설록 티뮤지엄을 지었다. 경작에 필요한 퇴비를 마련하기 위해 4천마리 넘는 돼지를 길렀던 자리다.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오설록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다. 티뮤지엄 확장에 이어 티스톤, 이니스프리 하우스 등 이곳의 검박한 건축을 진행한 조민석(매스스터디스)에 따르면, “바둑알을 하나씩 놓아 바둑판 위에 집을 키우듯 … 환경과의 관계성을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확장해 나가는 느리고 섬세한 과정”을 밟고 있다.

오설록 단지 전체의 골격을 다시 짜며 경관의 수정과 적응 과정을 이끈 정영선(조경설계 서안)과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의 조경 콘셉트는 ‘곶자왈의 복원’이다. 박승진에 따르면, 장기간에 걸친 오설록 조경 설계는 “현존하는 모든 외부 공간 요소를 나열하고 정해진 논리에 따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우는 소거의 과정”이었다. 그가 말하는 ‘정해진 논리’는 차밭이 들어선 중산간 경관의 원형, 즉 곶자왈이다. 키 작고 투명한 건물들 뒤편은 곧바로 곶자왈 수림대와 만나는 곳이다. 조경가는 원본에 어긋나는 것들은 덜어내고 곶자왈을 다시 단지 안으로 초대했다.

제주 중산간의 오랜 시간이 쌓인 원풍경을 잇고 엮었다. 사진 배정한

정영선 특유의 조경 디자인은 땅에 쌓인 시간과 이야기를 읽어내 주변 경관과 관계 맺게 하는 태도에 토대를 둔다. 이러한 태도를 그는 “지사(地史)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한다. 지사, 즉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독해해 설계의 조건과 연결하는 태도가 그의 작업에 깊이 배어 있다. 오설록 단지에서 재해석된 지사는 곶자왈이다. 거친 곶자왈 숲의 지형과 수목, 돌과 풀을 다시 받아들여 잇고 엮었다. 제주 중산간 고유의 지사가 쌓인 곶자왈의 원풍경을 장대한 생산 경관의 지사와 연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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