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사면권을 쓰는 법 [세계의 창]
하네스 모슬러(강미노) | 독일 뒤스부르크-에센대 정치학과 교수
독일에서 여름올림픽이 열린 52년 전, 세계 평화를 위한 이 국제 스포츠 행사는 잔인한 공격에 묻혀버렸다. 뮌헨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로 잡은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단을 구출하려다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얼마 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독일에 구금되어 있던 공범 3명을 석방하기 위해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납치해 독일 정부를 협박했고, 3명이 바로 풀려났다. 하지만 5년 뒤엔 달랐다.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이 수감된 동지들을 석방하기 위해 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와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납치했을 때 독일 정부는 협박에 원칙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범죄자들의 협박에 응하는 선례를 더 이상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객기는 가까스로 구출됐지만 슐라이어 회장은 살해당했다.
독일 정부는 최근 테러리스트의 협박 시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어려운 문제에 다시 한번 직면했다. 독일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노르웨이, 폴란드, 슬로베니아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러시아·벨라루스와 수감자 교환에 합의했다. 이 역사적인 협상을 통해 서방은 러시아 범죄자 10명을 석방하는 대가로 러시아 교도소에 수감된 16명의 정치범을 석방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특히 자국민 바딤 크라시코프를 독일 감옥에서 빼내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2019년 8월, 크라시코프는 대낮에 독일 수도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티어가르텐 공원에서 조지아(그루지야)인 젤림한 한고슈빌리를 살해했다. 이른바 티어가르텐 살인범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종신형을 선고받고 독일 감옥에서 복역 중이었다.
이번 8월 초, 동서 간 수감자 교환은 튀르키예 앙카라 공항에서 이뤄졌지만, 이 역사적인 사건의 중심에는 독일이 있었다. 독일 정부는 법치주의에 큰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티어가르텐 살인범을 법적으로 안전하게 석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독일의 법률 체계는 유죄 판결과 형벌을 선고받은 청부 살인범을 조건 없이 석방하는 것을 당연히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찾기 위한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그 첫번째는 연방 대통령이 티어가르텐 살인범을 특별사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협박으로 이뤄질 이러한 결정은 연방 대통령의 위상을 손상할 수 있고,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특별사면 제도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연방 대통령의 사면권은 특별한 상황이 특별한 방법을 정당화하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신중하게 행사돼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이 방법은 채택되지 못했다.
수감자 교환을 촉진하기 위한 두번째 방법은 형사소송법에 근거한 살인범의 석방이었다. 독일에서 바이마르공화국 때부터 존재한 이 법 규정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국외로 추방될 경우 형벌 집행 기관이 남은 형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권한을 지닌 옌스 로멜 독일 연방 검찰총장은 재량 검토를 거쳐 형 집행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자 검찰에 대한 의회의 감독을 보장하기 위해 감독권을 가진 마르코 부슈만 연방 법무부 장관은 로멜 총장에게 이 사건의 형 집행을 중단하도록 지휘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됐다.
독일을 비롯한 서방국들이 푸틴 대통령과 티어가르텐 살인범 등을 인도하여 후속 사건의 선례를 남기는 협상을 체결한 것이 옳았는지,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특별사면권, 검찰총장의 재량권, 법무부 장관의 감독·지휘권 등 정치적, 법적 제도의 남용을 방지하며 진정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기능의 핵심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극히 기울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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