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극장 위 ‘새로운 춤’의 홍수… 무대에 빛의 비가 쏟아졌다
현대 발레 낯선 새 영토 향해 야심찬 첫발
’컨템퍼러리 발레’ 표방 첫 공공 발레단
새하얗게 나풀거리는 로맨틱 튀튀, 깃털처럼 가볍게 무대 위를 떠다니는 무용수들, 달콤하고 애절한 오케스트라 음악…. 실은 이런 이미지들은 발레라는 거대한 대륙이 가진 영토의 일부에 불과하다. 23일 개막한 서울시발레단 창단 공연 ‘한여름 밤의 꿈’은 ‘백조의 호수’ ‘지젤’ 같은 클래식 발레의 아름다움에 익숙해 있던 우리 관객에게 ‘컨템퍼러리 발레’라 불리는 새로운 영토를 향해 문을 열어준 야심찬 첫 발이었다.
◇'새로운 춤’의 종합선물세트
셰익스피어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은 엇갈리는 사랑, 마법과 속임수, 화려한 무도회 등 춤을 위한 영감으로 가득한 작품. 고전 발레를 정립한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는 러시아 제국의 첫 황제 표트르 1세가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궁에 대적하기 위해 세운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페테르고프 궁전에서 1876년 ‘한여름 밤의 꿈’의 초연을 올렸다. 뉴욕 시티 발레의 조지 발란신(1904~1983)이 1962년에, 함부르크 발레의 존 노이마이어(85)가 1977년에 각자 자신만의 ‘한여름 밤의 꿈’을 처음 공연했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발레단들이 이들의 안무작을 공연한다.
이번 서울시발레단 창단 공연 ‘한여름 밤의 꿈’ 안무와 총연출은 재미 무용가 주재만(52) 펜실베이니아주 포인트파크대 교수. 그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는 전설적 안무가들의 기존 작품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원작의 모티브를 가져와 사랑의 다양한 양태를 춤으로 표현하되, 희곡 속 익살꾼 요정 ‘퍽(Puck)’을 등장시켜 분절된 춤과 춤의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덕분에 컨템퍼러리 발레의 다양한 경향과 표현 양식들을 한꺼번에 펼쳐놓은 ‘새로운 춤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무대가 120분(인터미션 포함)의 긴 러닝타임에도 자기 완결성을 가질 수 있었다.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구슬들을 한 가닥의 실로 꿰어놓은 것처럼.
◇대극장 무대에 빛의 비가 쏟아졌다
1막 프롤로그부터 파격적이었다. 대극장 무대 한 가운데 시즌 단원 무용수들의 클로즈업한 상반신이 타원형 액자 속 초상화처럼 프로젝션 영상으로 떠올랐다. 영상은 그 아래서 무용수들이 직접 추는 춤과 연계됐다. 회화적 배경 앞 무용수들의 동작에 집중하는 클래식 발레와 달리, 영상과 조명 등 기술 요소를 적극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선언과 같은 시작이었다.
대극장 무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영사막과 무대 위 전체에 조명과 영상으로, 물 한 방울 튀지 않고 폭우가 쏟아지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1막 중반부는 압도적이었다. 무대 위로 쏟아지는 빛의 비 속에서 무용수들의 신체는 때로는 빛으로 빚어낸 곡선의 패턴 문양이 되고, 때로는 빗속을 질주하는 야생의 짐승처럼 보였다. 기술과 춤의 합(合)에서 나오는 역동성이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1막 후반부로 가면서 등장한 하얀 깃털로 만든 나무 같은 거대한 무대 장치는 클래식 발레를 떠올리게 하는 스타일. 그 아래에선 남녀 무용수의 파드되(2인무)와 군무가 교차하며, 연인이 된 무용수들이 사랑의 밀어를 나눴다. 정갈하고 질서정연하게 조직된 고전적인 스타일의 춤. 하지만 이 잠깐의 평화는 곧바로 전복됐다. 단단한 근육을 드러낸 남성 무용수가 강렬한 피지컬과 속도감의 춤을 선보이는 가장 역동적인 현대 무용으로 급속히 유턴한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스타일과 양식, 서로 다른 음악과 춤이 교체하며 리듬감을 만들어냈다. 뚜렷한 서사 없이 120분간 이어지는 장막 발레인데도 눈을 뗄 수 없도록 관객의 집중력을 끌어올린 힘은 이 리듬감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무대 위로 올라온 카메라… 춤의 파격
독일의 천재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이 17살에 서곡을 작곡했던 ‘한여름 밤의 꿈’ 음악에 기반한 전설적 안무가들의 작품과 달리, 다양한 독일 가곡들로 이야기의 약점을 보완하는 음악 활용도 영리했다.
2막 초반부엔 ‘한여름밤의 꿈’의 익살꾼 요정 ‘퍽’ 역할의 무용수가 카메라를 끌고 무대에 올랐다. 카메라는 몸과 몸을 부딪히며 밀집해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의 신체를 무대 뒤 영사막에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무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 실시간 영사하는 방식 역시 여러 전위 연극과 현대 무용 공연에서 다양하게 활용돼온 스타일이다. 2막 중반엔 무대 뒤편을 마치 거대한 스크린처럼 사용해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무용수들의 신체를 전시하고 그 아래 무용수들의 춤이 펼쳐지기도 했다. 영상 기술의 접목이 무용 공연 무대를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인상적 장면. 모든 무용수들이 푸른색 유니타드 차림으로 새벽 동이 터오는 푸른 바다 위를 유영하는 것 같았던 2막의 마지막은 안무가 주재만과 함께 작업해온 작곡가 필립 대니얼의 라이브 피아노 연주와 잘 어울려 하나된 피날레였다.
◇‘프로젝트 중심 발레단’ 한계 극복은 과제
서울시발레단은 국립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 만에 창단한 국내 세 번째 공공 발레단. 우리나라 공공 발레단이 ‘컨템퍼러리 발레’를 표방한 것은 처음이다. 아직까지 예술감독을 따로 임명하지 않고, 시즌 단원을 선발해 안무가와 작품에 중심을 두고 공연을 제작하는 시스템이다. 시즌별, 프로젝트별로 무용수들이 결합하고 해산하는 운영 방식은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발레단’으로서의 유기적 통일성에는 약점이 생긴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특히 갈라 혹은 소극장 공연이 아닌 대극장 전막 발레 공연은 주역 무용수 한 두 명의 뛰어난 기예로 판가름나지 않는다. 발레단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흔히 군무라고 부르는 ‘코르 드 발레’의 ‘합(合)’. 춤의 ‘합’ 혹은 어떤 ‘통일성’은 고전 발레에서 강조되는 ‘칼군무’와도 다른 발레단만의 고유한 특성일 것이다. 이번 공연의 군무 무용수들은 음악을 읽어 움직임에 적용하는 태도가 저마다 달랐고 동작의 속도와 흐름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무용수들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이질적 배경과 커리어를 갖고 만나 단기간 연습으로 호흡을 맞춘 이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서울시발레단이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가질 수 밖에 없는 약점이다. 그 약점이 군무 장면마다 눈에 띄는 점은 아쉬웠다. 서울시발레단의 컨템퍼러리 발레가 극복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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