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나를 그린 화가들] 세상에 절망할지언정 세상을 피하지 않았다
◆ 매경 포커스 ◆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빈센트 반 고흐가 아닐까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과 '별이 빛나는 밤' 등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정작 고흐가 살던 시기에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무관심했죠.
고흐는 요즘으로 치면 'N포 세대'의 전형이었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그는 결혼하지 못했고, 아이도 갖지 못했습니다. 친구도 많지 않았죠. 고흐의 그림은 돈이 되지 않아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자신의 예술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고흐는 자주 상처받았습니다.
그래도 고흐는 밝고 따뜻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가 늙고 추해지고 고약해지고 병들고 가난해질수록, 나는 더 멋지게 구성된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로 보복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죠.
늦깎이 화가가 되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고흐는 20대의 많은 시간을 적성을 찾는 데 썼습니다. 고흐는 프랑스 구필 화랑의 네덜란드 지사에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선교사로 일했지만 설교 기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면직됐습니다. 고흐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스로 늦었다고 생각했고,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고흐는 자신을 믿고 그림의 길에 들어섭니다.
당시 고흐에게 가장 영향을 준 화가는 장 프랑수아 밀레였습니다. 밀레는 시골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린 화가죠. 고흐는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이 그림의 주된 소재가 돼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농부들의 고단한 하루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좁은 집에서 가족들이 감자를 먹고 있습니다. 램프 불빛은 사람들의 여윈 얼굴과 뼈마디 굵은 손을 비춥니다. 고흐는 어둡고 얼룩덜룩한 색으로 가난한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파리에서 색채를 받아들이다
고흐는 1886년 프랑스 파리로 향합니다. 파리에서 그는 인상주의 화풍을 일부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색채는 파리에 오면서 밝고 생동감 넘치고 선명하게 바뀌었습니다. '탕기 영감의 초상'은 파리의 화상인 탕기 영감을 그린 그림입니다. 탕기 영감은 가난한 화가들에게 외상으로 값싸게 재료를 팔았고, 돈을 빌려주거나 식사를 나눠줬죠. 이 그림에서 탕기 영감의 선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회색 펠트 모자를 한 자화상'은 고흐가 점묘파 기법을 독창적으로 적용한 작품입니다. 고흐는 짧은 선을 긋는 방식으로 대담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배경에는 파란색과 주황색을, 수염과 눈에는 빨간색과 녹색을 사용하는 등 보색을 나란히 배치했습니다. 아무리 돈독한 형제여도 같이 살면 부딪힐 수밖에 없죠. 한 아파트에서 살던 고흐와 테오의 관계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또 파리의 물가는 높았습니다. 파리에 싫증이 난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이동했습니다.
아를에서 고갱과의 생활
아를은 고흐가 찾던 곳이었습니다. 따사로운 햇볕과 화사한 풍경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고흐는 해바라기를 소재로 열 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꽃병에 꽂힌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의 배경은 넓은 붓질이 돼 있어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반면 꽃잎과 잎은 방향에 따라 자유롭게 붓을 놀렸습니다. '밤의 카페 테라스'에선 어두운 하늘이 불빛을 밝힌 노란색 카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관람자의 시선은 노란빛 카페에 쏠립니다. 테라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밤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고흐는 아를에 있을 때 폴 고갱을 초대했습니다. 고흐는 아를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동료 예술가와 함께 지내면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고, 생활비도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고갱과 지내면서 고흐는 자신과 고갱의 의자를 그렸습니다. 이 의자들은 고흐와 고갱의 성격을 보여줘 '얼굴 없는 초상화'의 역할을 합니다.
'고갱의 의자'는 나무로 된 안락의자의 모습입니다. 의자의 붉은 갈색과 배경의 녹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가스등이 의자를 비추고 있죠. 촛불과 두 권의 소설책이 놓여 있어 고갱의 지적인 면을 부각했습니다. 반면 '고흐의 의자'는 밀짚으로 돼 더 단순합니다. 그 위에 파이프와 담배 주머니가 놓여 있습니다. 고갱의 의자보다는 소박하고 겸손한 느낌이 나죠.
고흐와 고갱의 생활은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함께 많은 주제를 연구했고, 예술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하지만 고갱이 아를에 온 지 9주가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였는데요. 고갱은 고흐를 내버려 둔 채 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고갱의 회상에 따르면 고흐는 그날 고갱을 면도칼로 위협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냈습니다. 당시 고흐는 동생 테오로부터 약혼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고흐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정서적 안정을 주고 재정적 도움을 주던 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고흐가 공황 상태였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은 귀 절단 사건 이후 고흐가 그린 자화상입니다. 굳은 표정에서 슬픔이 느껴집니다. 고흐는 커다란 붕대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가다
귀를 자른 후 고흐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아를 시민들은 고흐를 구금하라는 탄원서를 냈습니다. 결국 고흐는 자기 발로 다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를에서 북동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생폴드모졸의 정신병원에서 고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온종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밤하늘은 소용돌이치고 있고, 초승달과 별이 진동하듯 빛을 내고 있습니다. 마을 안 주택들은 불을 환히 밝히고 있죠. 고흐에게 가족들이 함께 사는 이 집들은 아늑해 보였을 것입니다. 앞쪽 왼편의 사이프러스 나무는 밤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듯 역동적으로 솟아올라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몇 번 평정을 잃었습니다. 1년 동안 그는 네 차례 발작했습니다.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고흐가 물감을 삼켜 음독 자살을 시도한 뒤 깨어나서 그린 그림입니다. 고흐의 두 눈은 쓸쓸하면서도 슬퍼 보입니다. 뺨은 홀쭉해져 야윈 모습입니다.
공동 작가, 테오
동생 테오는 고흐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테오는 1880년부터 형을 부양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주는 동생에게 고흐는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고흐는 테오에게 "그림을 그리느라 너에게 너무 신세를 졌다는 채무감과 무력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죠.
그런 고흐를 테오는 항상 지지해줬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과 '해바라기'를 비롯한 고흐의 그림에 대해 "정말 훌륭하다"며 "언젠가는 분명 큰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응원했습니다. 또 미술계가 빠르게 변해간다는 걸 알리며 "지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그 인기를 영원히 누리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걸 기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했죠.
고흐는 테오를 그림의 공동 작가라고 여겼습니다. 고흐는 테오에게 "내 작품에 무언가 좋은 점이 있다면, 그중 절반은 네가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고흐가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마지막 달, 테오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테오와 그의 부인 요안나는 삼촌의 이름을 따 아기의 이름을 빈센트로 지었죠. 고흐는 자신처럼 불행한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처음에 그 이름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아이가 고흐와 같이 참을성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염원했습니다. '꽃 핀 아몬드 나무'는 고흐가 조카 빈센트를 위해 그린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꽃이 핀 가지가 뻗어 있습니다. 꽃나무에는 동양적인 화풍이 묻어납니다. 평소 고흐는 거친 붓질을 했지만, 이 그림에서만큼은 배경을 차분하게 묘사했습니다. 고흐는 당시 꽃 핀 나뭇가지 그림 중 이 그림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밝혔습니다.
마침내 평온에 이르다
약 1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고흐는 퇴원 후 오베르쉬르우아즈에 가 밀밭을 즐겨 그렸습니다. 고흐의 삶은 순조롭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37세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1890년 7월 2일 고흐는 자신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총알이 가슴에 박힌 고흐는 이로부터 이틀 후 숨을 거둡니다. 고흐는 세상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돌려받지는 못했습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선 "우리는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을 한탄했죠. 그래도 고흐는 현실의 고통에 굴복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고흐는 불행했다고 여겨지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희망을 느낍니다. 이는 고흐가 자기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흐는 테오에게 "나는 종종 내가 부자라고 생각한단다"며 "작품 속에서 내가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것, 나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고흐는 온 힘을 다해 예술에 몰두했습니다. 작품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았고, 용기 있게 자기의 길을 갔죠. 고흐의 작품을 찬찬히 감상하며 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정유정 기자의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작가의 대표 작품을 살펴보며 우리가 몰랐던 예술가의 뒷이야기를 파헤칩니다.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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