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자’ 우크라軍 총사령관, ‘몰래·빠르게’와 전자보호막으로 러시아 약한 고리 쳤다
통행 어려운 ‘가을’ 피하고 ‘트럼프 리스크’ 회피 위해 ‘8월 기습전’ 감행
(시사저널=채인택 국제저널리스트)
우크라이나가 8월6일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쿠르스크주를 기습하면서 2년6개월로 접어들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새 변곡점을 맞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총사령관은 8월21일 자국 군이 러시아 영내로 28~35km 전진해 1263㎢의 영토와 93개 마을을 장악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우크라이나가 드론으로 모스크바 교외를 공격하는 등 국경을 넘어 공격을 계속하고 있지만 이를 방어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2014년부터 친러 세력이 일부 장악 중인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의 주요 병참 거점인 노브고로드스코예(우크라이나어로는 뉴요크) 마을을 해방시켰다고 밝혔다. '장군 멍군'인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8월 기습은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주로 우크라이나 영토에 국한됐던 전투 영역이 지리적으로 러시아 영토까지 확대됐다는 점이 그 하나다. 이번 기습으로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79년 만에 처음으로 본토 일부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서방의 다양한 무기 공급에도 2023년 여름 공세에서 제대로 전투를 치르지 못했던 우크라이나군이 이번에 괄목할 만한 수준의 군사적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관심을 끈다. 러시아는 이런 상황에 신속 대응하지 못하면서 재래식 군사력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번 기습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월 군 총사령관을 맡긴 올렉산드르 시르스키다. 2019년부터 지상군 사령관을 맡으면서 2022년 러시아의 침공 이후 수도 키이우 방어 작전과 중북부 하르키우 역공세 그리고 2023년 동부 바흐무트 방어전 등을 맡았다.
시르스키는 전임 발레리 잘루즈니와 작전 스타일이 대조적이어서 더욱 주목받는다. 잘루즈니는 신중한 작전으로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력을 비축하면서 전쟁을 끌어가는 편이었다. 이런 지휘 스타일은 방어전에서 성과를 거뒀으며, 그 덕분에 국민과 군인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국민 영웅이 됐다.
병력 손실 마다하지 않고 작전 펼쳐
문제는 잘루즈니가 서방이 지원한 전차 등을 앞세워 2023년 6월 중부 자포리자와 동부 도네츠크를 중심으로 벌인 역공세가 지지부진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12월말 사실상 종료된 이 작전에서 우크라이나는 전진은커녕 몇몇 전략적 요충지를 잃는 패배를 기록했다. 한정된 군사력을 전략적 요충지에 빠르게 집중한 뒤 치열하고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대신 병력을 지나치게 넓게 산개하는 바람에 화력에서 앞선 러시아의 반격 앞에 무너졌다는 평가다. 역공세 실패로 전선이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우크라이나 국민과 서방에는 실망감을 안겨줬으며, 반대로 푸틴은 기고만장해졌다.
반면 시르스키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하고 저돌적인 작전으로 싸움터를 러시아 본토로 확대했다. 그의 작전과 지휘 스타일은 별명에서 드러난다. CNN은 시르스키가 병사들 사이에서 '제너럴 200'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보도했다. 옛 소련군 군사부호에서 전사자를 '그루즈 드베스찌(화물 200)'로 부른 데서 기인한 것으로, '전사자를 양산하는 장군' 정도의 의미다. 지난해 러시아군 및 바그너 용병과 치른 바흐무트 전투에서 병력 손실을 마다하지 않고 혈전을 치르면서 얻은 별명이다. 뉴욕타임스는 시르스키가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전했다.
시르스키는 기습 초기 정보전·보안전·전자전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우선 각종 정보를 바탕으로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아 2만 명 정도의 병력을 집중해 기습 공격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시르스키가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작전을 펼친 것이 초기 작전 성공 요인의 하나로 꼽힌다. 시르스키는 기습을 위해 국경 바로 앞인 수미 지역으로 이동한 부대에도 자세한 진격 목표와 공격 개시 시기를 작전 직전까지 알리지 않았을 정도로 정보 보안을 철저히 했다. 통신 보안과 함께 철저한 은폐·엄폐로 이번 작전을 위한 병력 집결을 러시아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막았다.
전자전 성과도 눈에 띈다. 강력한 방해 전파를 발사해 러시아군의 통신을 두절시키고 드론을 오작동시키거나 무력화하는 재밍(전파방해)으로 기습 초기 러시아군의 눈과 귀를 막았다. 선두 병력에는 체온이 노출되지 않는 방탄조끼를 입혀 온도 감지 센서를 갖춘 러시아군의 관측 드론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시르스키는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철저한 보안과 은폐·엄폐 속에서 좁은 곳에 전력을 신속하게 집중하며 기동전을 펼쳐 러시아 영토 깊숙이 파고든 것이 초기 진격 성공의 요인으로 보인다. 시르스키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16% 정도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이다. 소련 시절 러시아에서 태어나 소련군으로 근무하다 소련 해체 뒤 소속 부대가 우크라이나군에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 국민이자 군인이 됐다. 그의 부모와 형제는 현재 러시아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배경 속에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이 된 시르스키로선 국민과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군사적 성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했을 것이다.
'러시아 눈귀' 가리고 2만 명으로 기습 타격
시르스키가 8월을 기습 시기로 잡은 배경에는 기후와 정치적 이유가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원에선 비포장길·좁은 길·배수불량지 등이 진창으로 변해 통행이 어려워지는 시기가 있다. 흔히 봄에 눈이 녹으면서 생기는 현상으로만 알려졌지만, 사실 가을에도 비가 내리면서 이런 통행 장애가 발생한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로선 가을이 오기 전에 속도 있는 기습을 펼치기 위해 작전 시기를 여름으로 잡은 걸로 볼 수 있다. 일단 가을이 오기 전에 최대한 진격해 일정 영역을 장악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의도다.
정치적 변수는 11월5일 치러지는 미국 대선이다. 미 대선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인 친러 성향의 공화당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우크라이나로선 군사적·경제적 지원 중단 등 국제정치적 재앙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우크라이나는 자칫 점령지는 물론 완충지역까지 러시아에 넘기고, 자위적 군사력조차 제한당하는 등 푸틴이 요구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사실상 항복에 준하는 정전협정을 맺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나토나 유럽연합(EU) 가입 등 서방과의 외교활동도 제약을 받고, 내부적으로도 친러파에 정권을 넘기는 등 주권도 속국 수준으로 제한받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견제에 호의적인 민주당의 해리스가 당선되더라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지원이 장기적으로 이뤄질 것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자칫 천문학적 세금이 투입되는 데 대한 '우크라이나 피로감' 여론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로선 미 대선 과정에서 이런 논란이 생기는 것을 미리 막고 지속 가능한 미국 지원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가을이 오기 전에 가시적인 군사 성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유럽 정치다. 12월1일 새 EU 집행부가 출범한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향후 지원 규모는 가장 중요한 의제로 다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친러 성향의 극우파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우크라이나로선 지원에 회의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군사적 성과가 필요했다.
푸틴, '소방수' 역할 해온 체첸 깜짝 방문
주목할 점은 기습을 당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응이다. 러시아 대통령실 영문 사이트는 푸틴이 8월20일 (카프카스 북부) 북오세티아-알라니아의 베슬란 1호 학교를 찾아 추모시설에 헌화했다고 밝혔다. 이날은 8월6일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기습 15일째를 맞는 날이다.
모스크바타임스는 푸틴의 방문이 이슬람 테러조직에 의해 2004년 9월1~3일 발생했던 베슬란 학교 인질극의 20주년을 맞아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당시 자동소총과 자폭벨트로 무장한 32명으로 추정되는 체첸 분리주의 무장대원이 개학식을 맞아 학교에 모여 있던 학생·교직원·학부모 1100명 이상을 인질로 잡고 사흘간 군경과 대치하다 어린이 186명을 포함한 333명을 살해하고 78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러시아는 매년 이즈음 현지에서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푸틴은 추모 기간보다 11일 앞서 이곳을 찾았다.
AP통신에 따르면 푸틴은 이날 베슬란에서 가까운 러시아령 체첸공화국을 13년 만에 깜짝 방문했다. 푸틴은 람잔 카디로프 체첸공화국 수반의 안내로 구데르메스에 있는 특수전 학교를 찾았다. 카디로프는 1차 체첸전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다 내부 권력투쟁으로 친러파로 돌아섰던 아흐마트하지 카디로프의 아들이다. 아흐마트하지는 2003년 초대 체첸 수반에 올랐지만 2004년 반군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폭탄 공격으로 숨졌다.
러시아는 이날 푸틴이 찾은 특수전 학교를 우크라이나 전선 투입을 위한 '자원 전투원' 훈련장이라고 소개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카디로프는 지난해 5월 2만6000명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전선에 파병했다고 말했다. 체첸의 친러 민병대는 푸틴의 '소방수'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푸틴은 체첸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옛 소련 붕괴 뒤 독립을 원했던 카프카스의 무슬림 지역인 체첸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러시아에 맞서 1994년 12월~1996년 8월 1차 체첸전쟁 이후 일시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푸틴은 총리에 오른 1999년 8월 2차 체첸전쟁을 시작해 초토화 작전으로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 1999년 12월31일부터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푸틴은 2000년 2월7일 수도 그로즈니 점령을 손수 발표했다. 체첸 전역은 다시 러시아 영토로 재확립됐으며, 전쟁은 2000년 4월 끝났다.
푸틴이 2000년 3월 대선에서 53.44%의 지지율로 당선해 그해 5월7일 취임한 데는 2차 체첸전쟁 승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푸틴이 이처럼 초기 승부수이자 정치적 영향력을 이끈 기관차 역할을 해온 체첸을 방문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여러 함의를 지닌 우크라이나의 8월 쿠르스크 기습이 앞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국제사회의 관심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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