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존재 이유는 오직 환자”... 진정한 ‘의인’ 뜻 남긴 윤대원
얼마 전 한림대의료원으로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약 50년 전 항문 없이 태어난 아들을 죽음에서 건져줘 고맙다는 아버지의 편지였다. 편지의 수신인은 당시 집도를 맡았던 고 윤대원 학교법인일송학원 이사장이다. 국내 의료기술이 아직 선진 반열에 오르지 못한 시절 그는 한림대한강성심병원에서 태어난 지 48시간된 아이에게 인공 항문을 만들어줬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덕분에 당시의 아이는 어느덧 아들 둘을 둔 건강한 아빠가 됐다고 한다.
윤 이사장이 지난 6월 향년 79세로 별세한 가운데 외과 의사로서 그가 남기고 간 여러 업적들이 주목받고 있다. 간을 포함한 복부 전체가 배꼽 밖으로 튀어나온 아기를 옆구리 절개법으로 구한 일, 양잿물로 녹아버린 식도를 우측 대장과 붙여 살려낸 경험 등 그가 삶을 되찾아준 환자만 수백명에 달한다. 생전에 그는 의사의 존재 이유가 ‘환자’에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를 두고 의료계 안팎에선 진정한 의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윤 이사장은 1945년에 태어나 용산중·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6.25전쟁 당시 피난을 다니며 전국 팔도의 자연을 맛봤고 이를 계기로 생물 연구에 심취한 것이 대학 진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중 자연에 대한 애정을 사람에게도 넓혀보는 것이 어떻냐는 가족들의 권유에 가톨릭대 의대로 편입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의대행이 놀랍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와 고모가 당시 저명한 의사였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외과 의사로 명성을 날렸다. 1987년 국내 최초 췌장이식술에 성공하며 당뇨 치료의 지평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 그가 명의로 거듭날 수 있었던 데에는 최고급 일대일 수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국내 일류 의료기관이었던 백병원을 재건하고 성심병원을 설립하는 등 의료계에 큰 획을 그은 아버지를 통해 내로라하는 의대 교수들로부터 도제식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국내 최초 신장이식술에 성공한 이용각 가톨릭의대 교수 등이 포함됐다.
물론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은 단연 아버지 윤덕선 박사다. 윤 박사는 ‘환자가 있는 곳에 병원이 찾아가야 한다’는 소신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살던 곳이지만 변변한 의료기관 하나 없던 영등포에 한강성심병원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윤 이사장은 전공의 시절 남들이 꺼려하는 섬벽지 근무를 자원했고, 한강성심병원 개원 후엔 월 2회 무료진료를 통해 지역 영세민들을 도왔다. 지금도 한강성심병원은 소위 ‘돈 안되는 진료’라 불리는 화상 치료에 전념하며 의료 사각지대 해소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발자취가 꽃길 일색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과계 실력자로 자리매김할 무렵 그는 간암 투병을 시작했다. 장기이식을 수십차례 해온 전문의가 간 이식술의 당사자가 된 것이다. 청천벽력같은 상황이지만 그는 한번 더 겸손해질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반추했다.
좌충우돌한 전공의 시절부터 명의를 거쳐 한림대의료원을 이끌기까지 그가 취한 필승 전략은 ‘정직’이다. 의대 재학시절엔 경쟁과 진급에 목매 커닝을 일삼는 동료들이 있었고, 의사가 된 후엔 밤마다 응급진료에 불려나가지 않기 위해 자잘한 요령을 피우는 동료들이 있었다. 일송학원 이사장에 오른 뒤부터는 거래처로부터 부정한 제안들이 난무했다. 그때마다 그는 의사와 병원의 숙명이 환자를 살리는 데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되뇌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최근 사람들이 그의 행보에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수개월째 지속 중인 의료대란으로 환자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한 상태기 때문이다. 그가 영면하기 전 남긴 회고록에는 ‘환자’라는 단어가 수차례 등장한다. 병원에 대한 정의도 남다르다. 그에 따르면 병원은 치료와 연구가 아닌 환자와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그야말로 사람이 목적인 곳이다. “어떻게 살지 선택할 권리는 물론 자신에게 있지만 의사만은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희생적 존재다. 생사여탈권이 주어진 상황에서 희생을 전제로 생명을 구하겠노라 약속한 사람인 것이다.” 특히 그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의사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의료계 안팎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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