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언론, ‘휠체어에 묶인’ 표현 지양...장애인에 자유 주는 수단”

장예지 기자 2024. 8. 2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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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주류’의 세상으로
“우린 이 사회의 영웅”
지난 23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사회영웅’ 사무실에서 만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과 사회영웅 대표 라울 크라우트하우젠(44). 라울이 한국의 이동권 투쟁 역사가 담긴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휠체어를 탄 소녀 엘라의 꿈은 우주 비행사다. 많은 이들은 엘라의 꿈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소녀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무중력 상태인 우주에선 엘라의 휠체어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년 넘은 독일의 장애인 인권운동단체 ‘사회영웅(Social heroes)’을 이끄는 활동가 라울 크라우트하우젠(44)이 동료와 지은 동화책 ‘엘라가 우주를 정복했을 때’ 내용의 일부다. 선천적으로 뼈가 쉽게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 장애로 휠체어를 타야 하는 라울은 20년 이상 장애인 이동권과 사회 참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오는 28일 개막하는 파리 패럴림픽을 계기로 유럽 특사단으로 베를린을 방문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은 지난 23일(현지시각) 라울과 사회영웅 활동가들을 만나 한국과 독일의 장애인권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애인의 이동과 교육, 시설 거주 문제는 독일에서도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라울은 “독일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분리가 심하다. 장애인은 특수학교를 다니고, 장애인을 위한 특정 직장을 다녀 비장애인과 활동할 기회가 적다”고 말했다. 지난 2021년엔 포츠담에서 장애인 요양시설 직원이 장애인 4명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지만, 당시 정치인들은 “개인 직원의 일탈”이라며 무마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이에 라울은 2007∼2023년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을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했다. 그 결과 드러난 것만 40개 기관에서 79명의 가해자에 의해 218명이 폭행이나 성폭력, 살해를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라울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장애인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드러나지 않은 채 잊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회영웅은 시민들이 직접 제공한 데이터를 토대로 휠체어로 접근 가능한 부대 시설을 지도로 알려주는 ‘휠맵’을 14년째 제공하고 있다. 2년 전부터 구글의 정식 지원을 받게 된 휠맵은 한국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지난 2016년엔 장애인 통합지원 기준을 복잡하게 세분화해 지원의 장벽을 높인 ‘연방참여법’ 개정안 통과를 막기 위해 행동 단체를 조직하고, #나의법이아니다(#notmylaw) 슬로건을 내건 집회 등 여러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라울은 이런 활동을 “장애인의 주류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시민들이 직접 제공한 데이터를 토대로 휠체어로 접근 가능한 부대 시설을 지도로 알려주는 ‘휠맵’
15년 넘은 독일의 장애인 인권운동단체 ‘사회영웅(Social heroes)’을 이끄는 활동가 라울 크라우트하우젠.

이처럼 독일의 장애인 집단 시설의 문제를 고발하고, 이를 알리는 것 또한 라울의 주요 관심사다. 지난 2016년엔 본인이 직접 장애인 단기 요양 시설에 들어가 생활하는 모습을 몰래 촬영해 시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시설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없다. 식사와 화장실, 잠자리에 들 시간조차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시설이 장애인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다수의 (비장애인) 사회를 지키기 위해 시설은 존재하는 것이고, 장애인은 가둬지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시설을 통해 돈을 벌고 이익을 보는 건 비장애인 아닌가”라고도 반문했다. 이재민 전장연 활동가는 “하지만 서울시는 독일 등 유럽의 장애인 시설을 ‘좋은 사례’로 들어 시설 수용을 선전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장애’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미디어 활동도 활발하다. 사회영웅은 직접 온라인 잡지를 발행하고, 팟캐스트를 만든다. 특히 팟캐스트는 공영방송 채널로도 들을 수 있어 벌써 50회를 넘겼다. 라울은 “2년 전 큰 홍수가 나 사망한 120명 중 장애인은 12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잘 보도되지 않고, 나오더라도 언론은 장애인을 직접 인터뷰하지 않는다”며 “기자들에게 장애인 보도에 관한 워크샵도 주최하고 있다”고 했다. 그 결실 중 하나로, 독일 언론은 관용구처럼 쓰던 ‘휠체어에 묶인’이란 표현을 지양하게 됐다고 한다. 라울은 “장애인에게 휠체어는 묶이는 대상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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