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럴림픽 앞두고 유럽에 간 전장연…“잊히지 않기 위해 왔다”
서울올림픽과 서울장애인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8년 3월 송인학씨 등 20여명이 단식 농성에 나섰다.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국내 장애인들의 삶은 외면한 채 세계 장애인을 위한 ‘축제’에 예산을 쏟아붓는 정부의 기만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2년 뒤인 1990년 장애인고용촉진에 관한 법이 통과됐다.
서울장애인올림픽 개최 36년이 지난 2024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패럴림픽(8월28일~9월8일)을 앞두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40여명의 특사단을 꾸려 노르웨이와 독일을 거쳐 프랑스로 가는 유럽행을 택했다. 전장연은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을 가리켜 “장애인권운동이 불법시위로 명명돼 손가락질당하지만,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장애인 권리’는 숨겨져 버린다”며 “대한민국의 권리 약탈을 고발하고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패럴림픽 현장을 향한다고 했다. 전장연의 첫 해외 원정이기도 한 이번 활동은 시민 모금을 통해 모인 후원금 8천여만원의 성원으로 이루어졌다.
지난 22일(현지시각) 아침, 베를린의 출근길에서 전장연 활동가 박상호(밀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씨는 서울보다 좁은 지하철의 바닥 아래 내려앉았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포체투지(오체투지를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기어가는 방식으로 하는 행동)’를 하는 짧은 시간, 그를 제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장애인의 권리를 빼앗는 오세훈 시장을 막는 데 도와달라”는 독일어 메시지가 담긴 유인물을 펼쳐 들었다. 박씨는 ‘오세훈 스탑(STOP)’을 외쳤고, 다른 활동가들이 그를 뒤따랐다. 베를린 동물원역에서 5개 정거장을 이동하며 출근길 선전전을 한 특사단을 제지하는 독일 경찰은 없었다.
승객들은 서울시의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폐지를 비롯해 탈시설 조례 폐지 움직임 등이 담긴 전장연의 소책자를 읽어 내려갔다. 올해 서울시는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예산을 배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400여명의 최중증·탈시설 장애인은 일자리를 잃었다. 서울시는 일자리를 잃은 장애인들이 새로 도입되는 ‘장애 유형 맞춤형 특화 일자리 사업’으로 다시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장애인 단체는 서울시가 제시한 업무가 최중증 장애인에게 적합하지도 않고 일자리 규모도 250명으로 줄어들어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서울교통공사는 전장연 지하철 시위 등에 대해 손해배상청구 소송과 과태료 부과 카드를 내밀었다.
전장연 유럽 특사단은 28일 파리 패럴림픽 개막식에 앞서 22∼25일 베를린에 방문했다. 지하철역과 나치 독일 시절 우생학에 기반해 장애인 수십만명을 학살했던 ‘티(T)4 작전’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 주독 한국 대사관, 그리고 독일 통일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까지. 이들은 걷고, 버스와 트램을 타고 이동하며 시민들에게 왜 이곳에 왔는지 설명했다. 24시간 천막 농성을 열기로 한 대사관 앞에서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우리는 잊히지 않기 위해, 비장애중심주의를 철폐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며 “우린 장애인 집단거주시설에서,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 (장애인들이) 계속 사망하는 현실을 알려야 한다. 보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특사단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오가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선 바닥 대신 하늘을 보고 누웠다. 휠체어에서 내려와 죽은 듯 드러눕는 ‘다이인(die-in)’ 행위극을 한 이들은 “장애인도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싸워주십시오” 등의 구호를 외웠다.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이동과 교육, 노동은 모두 연결돼 있다. 이것들이 보장되지 않으면 장애인은 나고 자란 곳이 아닌 감옥같은 거주시설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며 “오세훈 시장은 보안관과 경찰을 앞세워 장애인과 활동가들을 (지하철에서)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린 시민들과 힘을 모아 권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외쳤다. 전장연과 함께 연대 활동을 약속한 국제앰네스티 독일지부의 테레사 베르그만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공권력의 탄압 문제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바란다”며 “집회를 위한 권리는 보호되어야 하고, 장애인 운동을 독일 앰네스티가 연대하게 돼 기쁘다”고 소회를 전했다.
한 시간 내내 집회를 지켜본 한 독일인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독일도 (장애인에게) 좋은 곳은 아니다. 이곳에서 목소리를 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독일에 거주하는 청각장애인 조혜미씨는 “나도 교통수단이 불편했고, 죽을 수 있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집회를 보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동행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프랑스인 위고 도메스(25)는 “프랑스에서도 장애인은 잘 가시화되지 않는다. (전장연의) 이런 집회 현장을 보는 것도 익숙하지 않지만, 매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전장연은 4년 넘게 지하철 선전전을 하며 장애인의 ‘사람다운 삶’을 위한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를 주장했다. 정부의 냉대로 희망은 자주 꺾였지만, 특사단 활동을 하며 이들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은 그럼에도 “투쟁”이었다. “제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저는 비장애인이 절대 될 수 없기 때문에 사회가 변해야만 제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우리는 혼자 싸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24일(현지시각)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열린 장애인인권영화제가 끝난 뒤 이형숙 대표가 말했다. 서울시는 앞서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의 예산 지원도 모두 끊었다.
베를린/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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