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3년차 윤 대통령의 ‘전쟁’ [아침햇발]
최혜정 | 논설위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임기 3년이 지나면 레임덕이 온다”며 이를 ‘임기 3년차의 저주’라고 불렀다. 5년 단임 대통령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역대 대통령은 측근 비리와 당정 불화, 정책 혼선, 비선 실세 논란 등 예외 없이 정치적 어려움에 처했다. 반면 국정 장악력을 회복하기 위해 각종 승부수를 던진 것도 이때다. 3당 합당(노태우), 전두환·노태우 단죄(김영삼), 남북정상회담(김대중), 대연정 제안(노무현) 등이 집권 3년차에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20%대(한국갤럽 기준)가 기본값이 된 지 오래지만, 온갖 의혹과 논란에 휩싸인 윤 대통령에게 레임덕 가시화는 더욱 치명적이다. 이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 윤 대통령이 선택한 방책은 “항전”이다. 사상 초유의 반쪽 행사로 치러진 8·15 경축식에서 윤 대통령은 “검은 선동 세력에 맞서 자유의 가치 체계를 지켜내려면, 우리 국민들이 진실의 힘으로 무장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나흘 뒤 을지국무회의에선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혼란과 분열을 차단하고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항전’의 의미는 ‘적에 대항하여 싸움’이다. 지난해까지는 야당과 비판 언론 등을 ‘공산전체주의’ ‘반국가 세력’이라 비난했다면, 이제는 이들을 싸워 이겨야 할 적으로 상정하고 ‘전쟁’을 공식화했다. 강경 보수로 분류되는 20% 안팎 고정 지지층을 기반으로 레임덕을 돌파하고, 나아가 반전을 꾀하겠다는 자신감마저 읽힌다.
조직의 설립 취지와 정반대 쪽에 서 있는 이들을 막무가내로 내리꽂는 인사 역시 이 맥락에선 해석이 가능하다. 지지자 눈높이에 맞는 극우적 성향과 반대 세력에 맞설 수 있는 투쟁력이 인선의 핵심 기준이 된 것이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은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 및 공익성”을 보장하기 위해 설치된 방통위의 취지를 온몸으로 거스르는 중이다. “공영방송이 공기가 아닌 흉기가 됐다”던 그는 취임 직후 공영방송 이사진을 속전속결로 교체하며 존재 의미를 과시했다.
반노동·극우 성향의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지명은 최악의 인사 참사다. “불법 파업에는 손해배상 폭탄이 특효약” “노조라는 헌법상의 특권을 악용해서 우리 경제를 다 망치는 민주노총을 태극기로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등 연일 폭로되는 그의 어록은 괴담집 수준이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자는 우리 사회가 어렵사리 쌓아 올린 인권의 역사를 한순간에 후퇴시킬 인사로 평가받는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긴 행진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했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이 위헌이라며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이끌었다.
총선 참패로 민심을 확인한 윤 대통령은 중도층 외연 확장은 아예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 입법을 통해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기대 역시 접은 지 오래라고 한다. 어쨌거나 탄핵 저지 의석은 지켰고 거부권으로 야당은 ‘제압’할 수 있으니, 행정부 중심으로 임기 후반기 ‘할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언론과 노동계를 ‘개혁’의 명목으로 손볼 수 있는 적임자는 누가 뭐래도 이진숙 위원장과 김문수 후보자다. 안창호 후보자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역시 핵심 지지층을 위한 맞춤형 인사다. 동시에 각 부처에 ‘용산’ 출신 차관을 전면 배치해 ‘대통령 직할 체제’를 노골화하고 있다. 정권 초부터 익숙한 행태지만, 최근 두어달 동안 대통령실 비서관이 부처 차관에 임명된 이가 9명에 이른다. 대통령실이 장관을 건너뛰고 직접 부처를 지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총선 참패 직후 윤 대통령은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제 와선 ‘국민의 뜻’을 반국가 세력과 검은 선동 세력이 유포하는 가짜 뉴스와 허위 선동, 사이비 논리 탓으로 돌린다. 국민 통합을 최우선에 둬야 할 대통령이 국론을 분열시켜 ‘정권 보위’를 위한 동력으로 삼고 있다. 윤 대통령은 앞서 건국절 논란에 대해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대통령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항전’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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