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소년까지 '지뢰밭'으로 내몬 증오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8. 2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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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32편
덴마크 지뢰 실화 ‘랜드 오브 마인’
지뢰제거 현장으로 내몰린 소년들
독일에 고통받던 덴마크 사람들
피해자가 가해자 돼버린 역설
증오를 용서로 바꿀 순 없을까

독일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부족한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유럽 북부에 '대서양 방벽'을 만들었다. 덴마크 해안선에 수없이 많은 지뢰를 매설한 이유다. 전쟁이 끝난 후 덴마크 정부는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독일군 포로를 투입했다. 그 속엔 소년병도 섞여 있었지만, 덴마크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독일을 향한 증오는 소년을 지뢰밭으로 이끌었다. 증오를 용서로 바꾸지 않은 비극이었다.

패전한 독일의 소년병들은 지뢰탐지기 없이 칼로 직접 덴마크 땅을 긁어가며 지뢰를 찾았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의 한 장면. [사진=더스쿠프 포토]

전쟁에서 지뢰는 가장 값싸고 효과가 큰 무기로 꼽힌다.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에 매설해 적의 이동을 방해하고, 적은 인원으로도 방어를 수월하게 할 수 있어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전차의 20%가 독일군 대전차지뢰에 파괴됐다.

1943년 여름, 쿠르스크전투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해 수세에 몰린 독일군은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을 막기 위해 '대서양 방벽'을 설치했다. 대서양 방벽은 프랑스 해안부터 벨기에, 네덜란드, 북부 독일, 북해의 덴마크, 노르웨이까지 이어지는 긴 해안선에 구축한 방어선이었다. 독일군은 해안선을 따라 철조망, 바리케이드, 토치카를 설치하고 해안가에 촘촘하게 지뢰를 매설했다.

특히 덴마크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이고 복잡한 해안선을 갖고 있었다. 스웨덴, 노르웨이와 인접한 데다 독일과도 가까웠다. 만약 연합군이 덴마크에 기습 상륙하면 독일군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동부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프랑스 해안에 배치된 병력을 빼내기 어려웠다. 덴마크를 지키던 소수의 독일군은 해안가에 지뢰를 대량으로 매설해 부족한 병력을 대체했다.

연합군은 덴마크에 상륙하지 않았고, 덕분에 덴마크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채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직후 덴마크에 주둔한 독일군은 모두 덴마크군과 영국군의 포로가 됐다.

전쟁이 끝나자 독일군이 해안에 매설한 수백만 개의 지뢰가 덴마크의 국가적 골칫거리로 남았다. 지뢰 폭발로 해안에 놀러 나간 민간인들과 어민들의 피해가 커졌고, 일부 지뢰는 갯벌에 파묻혔다.

특히 전쟁 중 독일군이 발명한 '유리지뢰(Glassmine -43)'는 탐지하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유리지뢰는 폭발 시 폭약의 화학물질과 함께 잘게 부서진 유리 파편이 인체에 파고들어가 2차 감염을 일으켰다. 살상보다 부상병 발생이 목적인 잔인한 무기였다. 여기에다 플라스틱지뢰, 이중으로 설치된 대전차지뢰 등도 묻혀 있었다.

지뢰의 수는 200만개에 달했다.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자 덴마크군과 영국군은 지뢰 제거작업에 독일군 포로들을 앞세웠다. 오랜 점령기를 겪은 덴마크인들은 독일군을 증오했다. 덴마크인들은 "너희들이 매설했으니 너희들이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전쟁 말기 병력이 부족했던 독일군은 소년들까지 동원했고, 덴마크에 배치된 병력의 상당수가 16세 이하 소년병이었다. 그중에는 10~11세 소년들도 있었다. 이들은 지뢰탐지기 없이 포복해 나가면서 단검으로 땅을 찌르는 방식으로 지뢰를 제거했다.

작업 중 폭발사고가 이어지면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덴마크 서부 해안에서 150만개가 넘는 지뢰를 제거하는 동안 2000여명의 소년병은 절반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2015년, 덴마크 다큐멘터리 감독 마틴 잔드블리엣이 독일과 합작으로 만든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당시 지뢰 제거에 동원된 독일 소년병들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과 모래사장을 기어가는 소년병들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칼 한 자루만 쥐고 지뢰를 제거하는 소년병들은 덴마크군과 영국군 장교들에게 가혹한 대우를 받는다. 날마다 생사를 넘나드는 소년병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작업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이었다.

소년병들을 지휘하는 덴마크군 상사 '칼 라스무센'은 이들을 자신의 반려견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며 냉혹하게 다룬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소년병들이 마을 외양간에서 쥐똥이 섞인 사료를 먹고 쓰러져도 마을 주민들은 그들을 돼지 취급할 뿐이었다.

덴마크군 장교들은 지뢰 제거 속도만 측정하면서 그들에게 무리한 작업을 계속 강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칼 라스무센과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소년병들과 가까워졌다. 공을 물기 위해 해안을 달리던 반려견이 지뢰에 폭사하자 칼 라스무센은 자신이 맡은 임무에 회의를 느낀다. 죄 없는 소년들이 지뢰밭에 내몰려 하나둘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 칼 라스무센은 조금씩 그들에게 마음을 연다.

마을 아이가 지뢰가 깔린 해안에 고립되자 소년병들은 목숨을 걸고 지뢰를 제거해 아이를 구해 준다. 그 후 사람들은 소년병들을 인간적으로 대해 주고, 그들 사이에는 조금씩 친밀감이 쌓이기 시작한다. 담당지역의 지뢰 제거가 끝나자 소년들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들뜬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칼 라스무센이 감독하는 소년병들에게 새로운 지뢰구역을 할당한다. 새로 맡은 구역은 온통 펄밭이었고, 지뢰를 탐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소년병들의 목숨을 소진해 지뢰를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독일군 소년병들은 대서양 방벽에 심어진 지뢰를 제거해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칼 라스무센은 이 잔인한 명령을 거부하고, 소년병들을 트럭에 태워 국경으로 이동한 다음 그들을 놓아준다. 그는 증오를 용서로 바꿨다. 국경을 넘어 뛰어가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칼 라스무센은 그들과 함께했던 '죽음의 해변'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 영화는 전쟁 직후 독일에 고통받았던 덴마크인들이 가해자가 되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독일 소년병들이 피해자가 된 아이러니한 상황을 응시하면서 전쟁과 인간을 향한 물음을 던진다. 독일과 덴마크는 이 영화를 합작으로 만들면서 희생자들을 함께 애도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 묻힌 지뢰는 1억개에 이른다. 한국의 비무장 지대에 묻힌 수백만개지뢰의 제거 문제도 통일 이후 국가적 과제가 될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 국가 앙골라에는 인구 1000만명당 무려 1500만개의 지뢰가 묻혀 있다.

지금도 세계에서는 지뢰로 한달에 800명 정도가 목숨을 잃고, 12 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애인이 되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이고, 20% 정도가 아이들이다. 덴마크의 해변 지뢰 제거작업은 2013년에 이르러서야 종료됐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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