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앞에 선 전직 대법원장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4. 8. 2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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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곳곳에서 민주화 열기가 분출하던 1988년 6월15일 젊은 판사 59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현대사에 '제2차 사법파동'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첫번째 성명에 참여한 59명 속에 서울지법 북부지원(현 서울북부지법) 김명수 판사가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사법부 출범 후 대법관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장에 오른 사례는 초대 김병로(1948∼1957년 재임)와 3·4대 조진만(1961∼1968년 재임) 대법원장의 경우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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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곳곳에서 민주화 열기가 분출하던 1988년 6월15일 젊은 판사 59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현대사에 ‘제2차 사법파동’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법관들은 대뜸 “사법부 수장 등 대법원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공화국 전두환정부 말기인 1986년 취임해 고작 2년 일한 김용철 대법원장이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였다. 지방에 근무하는 판사들까지 속속 동참하며 서명자는 430명으로 늘었다. 김용철은 깨끗이 사퇴를 결단했다. “성명서를 읽고 사법부에 대한 충정을 느낄 수 있었다”며 되레 소장 법관들을 격려했다. 첫번째 성명에 참여한 59명 속에 서울지법 북부지원(현 서울북부지법) 김명수 판사가 있었다. 29세의 패기 넘치는 3년차 법관이었다. 아마 정의감도 남달랐을 것이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2017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명수 춘천지법원장을 새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을 때 법조계는 발칵 뒤집혔다. 1948년 대한민국 사법부 출범 후 대법관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장에 오른 사례는 초대 김병로(1948∼1957년 재임)와 3·4대 조진만(1961∼1968년 재임) 대법원장의 경우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법원 역사가 아직 일천하고 법조 전문 인력도 부족하던 시절이니 두 사람의 인선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때와 달리 전직 대법관이 수두룩하고 현직 대법관도 13명이나 있는데 일선 지방법원장이 이들을 전부 제치고 대법원의 ‘1인자’로 직행한 것은 파격 그 자체였다. 실은 문재인정부와 ‘코드’가 맞는 몇몇 전직 대법관이 인사권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나 다들 일신상의 이유로 완곡히 고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세간에는 진보 성향 법관들의 연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및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김명수 법원장이 문재인정부 임기 중 대법원에 입성할 것이라고 점찍은 이가 많았다. 다만 대법관 말고 바로 대법원장을 맡을 거라곤 그들도 상상하지 못한 듯하다. 자신을 둘러싼 자질 논란을 의식했는지 김명수는 대법원장 후보자 신분으로 처음 대법원 청사에 출근한 날 취재진에게 “31년간 재판만 해온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본인이 대법원 재판연구관 그리고 법원장으로 일한 기간 말고는 일선 법원의 재판 현장을 떠난 적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법원행정처에 오래 근무하며 인사, 예산, 대(對)국회 업무를 주로 한 판사들을 겨냥한 일종의 폄훼 발언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의 그러한 인식이 훗날 사법부에 어떤 풍파를 일으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2021년 2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앞에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을 비판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근조 화환이 놓여 있다. 뉴스1
검찰이 지난 23일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소환조사했다. 2023년 9월 6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지 거의 1년 만이다. 그는 2020년 5월 더불어민주당이 탄핵소추 대상으로 거론하던 임성근 당시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를 부당하게 거부한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고발을 당한 상태다. 그만두겠다는 후배 법관을 향해 김명수는 “지금 (민주당이)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고 하면 국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겠냐 말이야”라고 내뱉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국의 사법부 수장이 삼권분립 원칙은 안중에도 없이 힘센 여당 국회의원들 눈치나 살핀 것이다. 임 부장판사는 결국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지만 이미 법관으로 임기가 끝난 뒤라 헌법재판소는 “심판의 실익이 없다”며 이를 각하했다. 코미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젊은 판사 시절 김명수가 보여준 그 남다른 정의감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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