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프의 2년 연속 US오픈 우승은 가능할까 [여자단식 프리뷰]
2004년 3월생인 코코 고프(미국)는 올해 3월 드디어 20대가 됐다. 즉, 작년까지는 10대였다는 말인데, 고프는 본인의 마지막 10대 US오픈에서 우승했다. 그녀의 첫 그랜드슬램 타이틀로 '세레나 윌리엄스의 재림'이라는 평가가 헛된 소리가 아님임을 US오픈 우승을 통해 증명해냈다. 미국 선수의 US오픈 여자단식 우승은 2017년 슬론 스티븐슨 이후 6년 만이었다. (남자단식은 2003년 앤디 로딕이 마지막)
세레나의 노쇠화가 뚜렷해진 2020년대 들어, 미국인들의 염원은 포스트 세레나 찾기였다. 그리고 미완의 대기로 평가 받았던 고프는 US오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며 자국 팬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고프는 올해 세계 2위 자리까지 뛰어 올랐고, 최근 열렸던 파리올림픽에서는 623명의 미국 선수단을 대표해 NBA 스타, 르브론 제임스(농구)와 함께 미국 대표팀의 공동 기수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또한 올해 US오픈에서도 센터코트인 아서 애쉬 스타디움의 여자단식 첫 경기로 배정 받으며 역시나 미국인들의 큰 관심과 인기를 받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중이다.
하지만 고프의 작년 8월과 올해 8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엄청난 기세로 US오픈 시리즈를 섭렵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조용하다. 경기력이 올라왔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디펜딩챔피언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심히 걱정되는 수준이다.
고프는 작년 8월, 세 차례 US오픈 시리즈 대회에 출전해 2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당시 기간 성적은 11승 1패. 그 중 시티오픈(WTA 500)에서는 무실세트 퍼펙트 우승을 일궈냈고, 웨스턴&서던오픈(신시내티오픈, WTA 1000)에서는 본인 최초로 천적, 이가 시비옹테크(폴란드, 1위)를 잡아내기도 했다. 이 승리는 여전히 시비옹테크 상대 고프의 유일한 승리이다. (현재 상대전적 고프 기준 1승 11패)
결국 고프는 US오픈마저 차지했다. 결승에서는 아리나 사발렌카(벨라루스)에 역전승을 거뒀다. 작년 8~9월, 북미 대륙에서 고프가 거둔 경기 성적은 18승 1패였다. 승률이 94.7%에 달하는 선수가 우승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수준의 작년 고프였다.
올해의 고프는 어떠할까.
7월부터인 올해 하반기, 고프의 최고 성적은 고작 16강이다. 8강 이상 오른 적이 없다. 7월 윔블던에서 16강에서 탈락한 고프는, 이어 열린 올림픽에서도 16강 문턱에 막혔다(고프를 꺾은 선수는 은메달리스트, 도나 베키치). 기대했던 메달권에 근접도 못한 고프는 바로 투어로 복귀해 8월 초, 내셔널뱅크오픈(토론토, WTA 1000)에 출전했으나 또다시 16강 탈락. 그리고 디펜딩챔피언 자격이었던 신시내티오픈에서는 충격의 첫 판 탈락을 당했다.
올해 7~8월 고프의 성적은 6승 4패(60%)에 그치고 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고프는 부상 이슈가 없다는 것이다. 사소한 부상이라도 있다면 고프의 현 부진이 이해될 수 있겠지만 고프는 현재 아픈 곳이 없다. 유난히 더운 올해 여름인데, 잔디 -> 클레이 -> 하드코트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스케쥴 속에 고프의 체력이 일찌감치 퍼진 것이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다. 고프의 이번 시즌은 현재까지 인상적이지 않음이 분명하다.
고프의 올해 부문별
(WTA 투어 10경기 이상, 올림픽 포함)
경기 수 : 52경기 / 3위
다승 : 38승 / 공동 4위
승률 : 73.08% / 5위
평균 세트 : +0.87 / 5위
평균 게임 : +3.87 / 2위
고프의 올해 대진은 3회전 이상부터 험난해질 전망이다. 이변을 잘 당하지 않는 스타일인 엘리나 스비톨리나(우크라이나)와의 3회전 맞대결이 유력하며, 4회전에서는 윔블던에서 본인을 탈락시켰던 엠마 나바로(미국)와 대결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분위기대로라면 고프가 3회전 또는 4회전에서 탈락해도 이상하지 않다. 고프의 2년 연속 US오픈 우승은 조금은 어려워 보인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최근 신시내티 타이틀을 따낸 사발렌카 @ 게티이미지코리아>
생애 첫 US오픈 타이틀 획득의 적기, 사발렌카
사발렌카는 의외로 아직 US오픈 타이틀이 없다. 최근 3년 연속 US오픈 4강까지 올랐으며, 심지어 작년에는 최초로 결승에 올랐지만 사발레카는 여전히 US오픈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다. 코트를 가리지 않는 강한 파워, 그리고 2021년 윔블던부터 올해 호주오픈까지 출전했던 8대회 연속 그랜드슬램 4강까지 오른 꾸준함으로 인해 사발렌카의 그랜드슬램 타이틀이 매우 많을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사발렌카는 호주에서만 두 번의 그랜드슬램(23, 24)을 따냈을 뿐이다.
다른 선수들보다 사발렌카를 콕 짚어 우승후보로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의 최근 컨디션 때문이다. 사발렌카는 올해 다사다난했다. 호주오픈 우승으로 기분 좋게 시즌을 출발했으나, 2월 중동 대회는 거의 건너뛰다시피 했다. 3월에는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자살)으로 큰 공황에 빠졌으며, 클레이 시즌에는 결승에서 매번 시비옹테크의 들러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프랑스오픈에서는 급체로 보이는 위장병으로 인해 8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사발렌카는 여기서 큰 결단을 내렸다. 좋지 않은 몸상태로 계속해 대회에 도전하기보다 푹 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어깨 부상도 있었던 사발렌카는 윔블던을 건너 뛰었고, 올림픽도 일찌감치 불참을 선언했다. 작년 윔블던 4강의 랭킹포인트를 방어하는 대신 건강을 택한 것이다. 전범국인 러시아 우방국으로 인해 모국 벨라루스 국기를 유니폼에 다는 대신 개인 중립국 선수로 뛰어야 했던 올림픽은 사발렌카에게 큰 동기부여가 될 수 없었다.
최상위권 경쟁 선수들이 윔블던과 올림픽의 강행군을 펼치는 동안, 사발렌카는 건강을 회복하며 US오픈 시리즈를 대비했다. 그리고 절정은 US오픈 전초전으로 불렸던 신시내티오픈이었다. 사발렌카는 무실세트 퍼펙트로 우승을 차지했고, 세계랭킹 2위 복귀에도 성공했다. 사발렌카가 이 대회에서 꺾었던 선수는 스비톨리나, 시비옹테크, 제시카 페굴라(미국) 등이다.
사발렌카의 올해 하반기 성적은 9승 2패(81.8%)로, 상반기 성적 30승 9패(76.9%)에 비해 조금 더 상승한 성적표를 받았다. 최상위권 선수들의 하반기가 상반기에 비해 처지는 점을 감안했을 때, 사발렌카의 올해 성적은 더욱 돋보이고 있다. 시즌 전체 승률은 78%까지 수복한 상황이다.
<윔블던 3회전에서 탈락했던 시비옹테크 @ 게티이미지코리아>
하루 휴식의 효과는? 시비옹테크
다른 요인들도 있겠지만 그랜드슬램에서 가장 큰 변수는 휴식이다. 전체 2주 일정으로 열리는 그랜드슬램이기 때문에 한 경기 후, 선수들은 필연적으로 하루 또는 이틀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매일 한 경기씩 반복되는 일반 투어, 그리고 올림픽과는 달리 그랜드슬램은 휴식 시간이 보장되는 것이다. 여름 내내 과한 일정으로 고단했던 선수들에게 하루 경기 후 하루 휴식이라는 일정은 그래도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를 가장 잘 볼 것 같은 선수는 시비옹테크다.
모범생 이미지가 강했던 시비옹테크이지만, 최근 '투덜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도한 스케줄로 인한 테니스 재미 저하가 골자였다. 이번 시즌 최다 경기 부문 60경기로 단연 1위를 달리고 있는 시비옹테크는 매 대회마다 평균 8강 이상의 성적을 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보다도 더 많은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여기에 올해는 올림픽마저 끼어 있었다보니 시비옹테크가 받는 정신적, 육체적 데미지는 예년보다 컸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시비옹테크는 롤랑가로스 우승 이후, 다른 투어는 생략한 채 윔블던을 뛰었고, 이후 다시 올림픽에만 뛰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신시내티오픈에만 출전하며 대회 출전을 최소로 조정했다. 무리하게 많은 대회에 출전하기보다 알짜 대회들에만 골라서 출전하며 체력적인 데미지를 최소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시비옹테크는 올림픽에서, 그리고 최근 신시내티에서 약간은 방전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푹 쉬는 것이야말로 시비옹테크에게 가장 필요해 보이는데, 이번 US오픈처럼 경기 후 하루 휴식이 보장되는 그랜드슬램 방식이야 말로 현재 시비옹테크에게 가장 필요한 방식의 일정이라는 것이다.
같은 하드코트일지라도, 시비옹테크는 호주오픈과는 달리 US오픈에서는 우승했던 경험이 있다. 올해에도 상대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대진표를 받았다는 해외 평가다. 사발렌카와 함께 US오픈 타이틀을 놓고 경쟁할 것이 가장 유력할 것으로 평가되는 선수는 단연 시비옹테크다.
<원조 미국 10대 돌풍의 기수였던 아만다 아니시모바 @ 게티이미지코리아>
주목해야 할 1회전 경기
정친원 vs 아만다 아니시모바
올해 US오픈은 현지시간 8월 26일 오전 11시(한국시간 8월 27일 0시) 개막한다. 대진표가 확정 발표된 가운데 여자단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경기는 올림픽 챔피언, 정친원(중국)의 예선 1회전이다. 정친원은 홈코트의 와일드카드, 아만다 아니시모바(미국)를 상대한다.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정친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니시모바는 약간 생소한 선수다. 아니시모바는 이번 US오픈 컷오프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랭킹이 132위로, 와일드카드가 아니라면 본선 진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올림픽 기간 열린 시티오픈에서 8강, 그리고 그 다음 주 열린 내셔널뱅크오픈에서는 깜짝 준우승을 차지하며 세계랭킹을 순식간에 49위까지 끌어 올렸다. 와일드카드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본선에 출전할 수 있었던 랭킹으로 올라선 그녀다.
더군다나 내셔널뱅크오픈에서는 세계 20위권 이내의 선수들을 32강부터 내리 상대해 격파했다. 다리아 카사트키나(러시아), 안나 칼린스카아(러시아), 아리나 사발렌카, 엠마 나바로를 연달아 물리치며 결승에 올랐고, 페굴라에게 아쉽게 패하며 WTA 1000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아직 22살에 불과한 아니시모바이지만 그녀야말로 코코 고프 이전 미국을 대표하는 10대 여자 선수였다. 2019년 프랑스오픈 4강 등으로 꾸준히 세계 25위권을 유지해왔다. 사발렌카와 파워 맞짱이 가능할 것이라는 유일한 선수라는 평가도 받아왔다. 어쩌면 아니시모바는 보다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시모바는 작년 5월,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하며 돌연히 투어를 떠났다. 그리고 올해 초 호주오픈을 통해 투어에 복귀한 상황이다. 과거에 비해 체중 조절해도 실패하며 훨씬 후덕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아니시모바는 올해 8월 US오픈 시리즈를 통해 다시 한번 존재감을 끌어 올리는 중이다.
호주오픈 준우승, 올림픽 금메달 등으로 현재 상황의 네임밸류는 정친원이 훨씬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아니시모바는 올해 US오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다크호스임이 분명하다.
아니시모바와 정친원의 경기는 27일 루이스 암스트롱 스타디움의 개막 경기로 배정됐다. 그리고 권순우의 남자단식 1회전에 12번코트의 두 번째 경기로 배정되어 있다. 권순우의 경기를 기다리는 국내 팬들에게는 직전에 열리는 정친원과 아니시모바의 중계를 챙겨보는 것을 권장한다. 여자단식 1회전 중 가장 재미있는 경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 박성진 기자(alfonso@mediaw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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