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수치상 불리한 해리스, 세대교체와 통합으로 승기 잡아
전세 역전당한 트럼프, ‘물가 폭등’ 주범의 파트너라며 해리스 맹공
(시사저널=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초상집 분위기였다가 잔치를 치르는 집이 있다면 꼭 분위기가 이럴 것 같다.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보며 든 생각이다. 민주당 출신 전현직 대통령부터 해리스를 지지하지 않았던 민주당 정치인들까지 한곳에 모여 잔칫집 흥을 돋웠다. 지난 7월 공화당 전당대회장에 공화당 출신 정치 거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과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트럼프 대관식처럼 치러진 지난 공화당 전당대회에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딕 체니 전 부통령 같은 공화당 핵심 원로들은 보이지 않았다. 공화당 대선후보를 지낸 밋 롬니 상원의원이나 폴 라이언 전 하원의장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 재임 당시 부통령을 지낸 마이크 펜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직 트럼프의, 트럼프에 의한, 트럼프를 위한 전당대회장처럼 보였다. 이미 트럼프가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보였으니 그 누구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 달 새 상황은 바뀌었다.
오바마 "트럼프는 징징거리는 억만장자"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장은 지난 한 달간 전열을 정비한 민주당의 '통합' 대선 출정식이었다. 전당대회 첫날 하이라이트였던 바이든의 연설도 통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합중국(united)"이라며 "우리가 모두 함께할 때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해리스가 47대 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수정하는 말실수도 했지만, 당원들은 오히려 더 박수를 보냈다. 연설 중 감정에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할 때마다 더 큰 환호가 나왔다. 잔칫집 분위기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바이든이 계속 대선후보로 남아있었다면 볼 수 없었을 장면들이다.
찬조연설에 나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하원의원도 통합이라는 화두를 놓고 보면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민주당 안에서 바이든·해리스와 각을 세워왔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힐러리는 2016년 대선 경선에서 바이든을 제치고 대선에 출마하면서 바이든과 다른 길을 걸었고, AOC는 당내 가장 급진적인 소장파 그룹의 대표로서 4년 전 전당대회에서 바이든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이 모두 통합의 대열에 함께 섰다. 여기에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나섰다. 그는 현재 무소속이다. 그럼에도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와 바이든과 해리스의 업적을 치하했다. 미국 민주당은 이로써 범진보 통합 대오로 대선 출정식 깃발을 올렸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 캠페인 구호 중 하나였던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를 "그녀는 할 수 있다(Yes, she can)"로 바꾸어 외치며 잔칫집 흥을 한껏 고조시켰다. 오바마도 "우리는 아프고 분열된 나라에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며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를 징징거리는 78세 억만장자로 비꼬며 "(트럼프 1기라는) 영화를 우리는 이미 봤고, 보통 영화는 속편이 더 나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며 트럼프를 낡은 옛날 정치인 이미지로 한번에 정리했다. 만약 해리스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이 한마디 정리는 중요하게 평가될 것이다. 해리스와 트럼프의 선거전을 '집권당 후보 대 도전 야당 후보' 프레임이 아닌 세대교체 프레임, '통합 대 분열' 프레임으로 바꿀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미 대선은 외형상 분명히 집권당 후보 해리스의 수성전이다. 트럼프는 도전하는 야당 후보다. 보통 경제 상황이 좋지 않으면 도전자 야당 후보가 집권당 후보를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게 선거의 상식이다. 현재 미국 유권자들이 체감하는 경제 상황은 좋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2021년만 해도 미국인의 신용카드 연체율은 사실상 0%였다. 막대한 코로나 팬데믹 지원금으로 미국인들의 초과유동자산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미국인 소득 하위 80%의 신용카드 연체율은 2% 중반이다. 상위 20%의 연체율도 1.3% 안팎이다. 미 노동부가 7월 발표한 실업률 이동평균도 기준치인 0.5%보다 높은 0.53%로 나와 일자리 침체 경보도 울렸다.
선거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 1916년부터 27번 치러진 미국 대선을 분석한 미국 예일대 페어 교수에 따르면 미국 물가상승률이 올해 2%를 기록하고, 경제가 4% 성장해야 집권당인 민주당 후보가 안정적으로 승리한다. 그런데 미 노동부가 지난 4월 발표한 미국 물가상승률은 3.5%였다. IMF에 따르면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 전망은 2.7%에 그친다. 물가상승률은 2%를 넘고, 경제성장률 전망은 4%에 미치지 못한다. 수치상으로 해리스에게 불리한 싸움이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해리스는 현재 '세대교체'와 '통합'의 프레임으로 승기를 잡고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 연임에 실패한 후 재도전을 하는 낡은 기성 정치인인 데다 사법 리스크를 짊어진 고령의 고집불통 백인 남성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리스 컨벤션 효과 끝나면 달라질 수도
이제 남은 기간에 미 대선은 트럼프 캠프가 경제 실패 프레임을, 해리스 캠프는 세대교체와 통합 프레임을 계속 강조하며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SNS에 자신이 직접 계란, 쿠키, 버터를 진열해 놓고 각각 얼마나 물가가 올랐는지 보라며 "이건 재난(It's a disaster)!"이라고 주장하는 동영상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민생과 관련된 물품들의 가격 인상률을 일일이 열거하는 카드뉴스도 제작해 선보이고 있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트럼프 백악관의 대변인을 지낸 스테파니 그리샴은 트럼프가 "자꾸 말하면 사람들은 믿게 돼"라며 지지자들을 비하했다는 폭로를 하기도 했다. 폭로가 사실이라면 트럼프는 물가 상승과 경제 실정에 대해 있는 말, 없는 말을 '무한 반복'할 개연성이 높다. 이 말이 중도층을 얼마나 공략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남은 4분기 미국 실물경제 상황이 얼마나 호전 혹은 침체를 보일지에 따라 트럼프와 해리스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해리스가 지금 후보 교체와 컨벤션 효과로 승기를 잡아가고 있지만 전당대회가 끝난 뒤 미국 유권자들은 본격 검증을 시작할 것이다. 현직 부통령으로서 어떤 일을 했고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9월10일 트럼프와 해리스의 TV 토론이 첫 검증의 분수령으로 해리스에게 더 중요한 이유다. 검사 출신 해리스가 범죄 혐의자 트럼프를 취조하듯 몰아붙이며 기세를 이어갈지, 백전노장 트럼프가 "바이든 옆에 있던 게 결국 당신 아니었나?"라며 역으로 몰아붙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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