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싣고 미대륙 횡단하는 트레일러…‘집의 몽상’이 의미하는 것

노형석 기자 2024. 8. 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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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타 작가 서도호 개인전 ‘스페큘레이션스’
대형 트레일러 트럭에 작가가 어린 시절 살았던 전통 한옥의 집과 정원을 싣고 미국 대륙을 횡단해 동부의 뉴욕에 닿는다는 몽상을 담은 ‘비밀의 정원’.

망상인가, 몽상인가, 이상인가.

이 시각예술가가 진행해온 작업 목록은 황당하다. ‘태평양과 북극해 한가운데에 살림집과 식당, 관람차 시설을 짓고 손님들을 받는다. 콘크리트 돌덩이로 만든 동상이 도시 여기저기를 꾸물꾸물 걸어다니게 한다. 전통 한옥을 미국 대학 교정 건물에 바람을 타고 착륙시킨다. 영국 대도시 건물 사이에 끼이게도 만든다….’

보통 사람이면 ‘미쳤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200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나선 이래 20여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작가로 서구 미술판을 활보해온 서도호(62) 작가에겐 망상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연구하며 진행하는 현실의 과업이다. 펄렁거리는 천으로 만든 한옥과 양옥을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선보이며 유동하는 집의 기억을 형상화해 유명해졌지만, 막막한 서구 현대미술의 망망대해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지침이 되어준 것은 세가지 요소였다. 성장기 한국 주거 공간의 기억과 이를 상기하고 재해석하는 드로잉, 그리고 기억 드로잉을 바탕으로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겠다는 집요하고도 강고한 의지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지난 17일부터 시작한 서도호 작가 개인전 ‘스페큘레이션스’는 이 세가지 요소가 작용한 작가의 성장 동력 혹은 작업의 구성 요소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 드로잉의 착상들이 모형으로 1차 구현되거나 현실로 실현된 사례들도 일부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을 비롯한 전세계 미술관에서 주로 선보였고 인천공항 1터미널 출입 공간에도 내걸려 그의 대표작으로 일반인들에게 친숙해진 집 설치작품 실물은 이번 전시에서 빠졌다.

서도호 작가가 올해 새로 작업한 두번째 ‘다리 프로젝트’의 드로잉 작업들 중 일부분.

전시에서 초점을 두는 건 집 등 대표작을 내어온 작가의 사유를 뒷받침하는 골간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른바 사유의 전략이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자 열쇳말로 제시되는 것은 작가의 사변적 사유를 뜻하는 ‘스페큘레이션’이다. 스페큘레이션은 개인과 공동체,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서도호의 숙고와 가설, 상상력의 작동 방식을 함축하는 용어라고 풀이한다. 그는 자신의 창작 활동을 ‘스페큘레이션 과정’이라고 설명하면서 1~3층 전시장에 유동하는 집과 사물, 시공간을 사유하고 끄적거린 20여년간 흔적들을 드로잉북과 모형 등을 통해 날것 그대로 제시한다.

전시는 ‘더 그라운드’라 불리는 1층에서 태평양과 북극해에 다리를 놓는 몽상을 담은 다리 프로젝트의 도면과 영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2012년 리움 개인전에서 보여줬던, 뉴욕과 서울을 연결해 태평양에 다리를 놓고 거처를 설치하는 프로젝트와, 지금 런던에 사는 그가 서울·런던·뉴욕 세 장소를 연결해 북극해 어딘가에 집을 짓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다리 프로젝트2의 작업물들이 나왔다.

더 그라운드는 집과 거주공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보여준다. ‘완벽한 집 S.O.S.(Smallest Occupiable Shelter)’란 이색 제목으로 전시된 주홍빛 구명복은 일주일간 북극해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일종의 최소 생존 공간이다. 작가는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작은 대피소’이자 가장 작은 집의 형식으로 이 구명복을 제안했다고 한다.

‘완벽한 집 S.O.S.(Smallest Occupiable Shelter)’란 이색 제목으로 전시된 주홍빛 구명복.

스페이스1에는 핵심인 스페큘레이션스 연작들이 등장한다.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똥별’의 모형에 우선 눈길이 꽂힌다.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제이콥스 홀 건물에 실제로 놓았던 설치작품 ‘별똥별’을 32분의 1 스케일로 재현했다. 정원이 딸린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주택이 회오리바람에 들어 올려져 제이콥스 홀 꼭대기에 내려 놓인 모습을 상상해 만들었다.

공간 안쪽에선 대형 트레일러 트럭에 작가가 어린 시절 살았던 전통 한옥의 집과 정원을 싣고 미국 대륙을 횡단해 동부 뉴욕에 닿는다는 몽상을 담은 ‘비밀의 정원’도 볼 수 있다. 집이 고정된 거처가 아니라 공간을 떠돌며 이동하는 삶터라는 작가 특유의 작업 개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올해 4월부터 미국 워싱턴디시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앞에 설치돼 화제를 모았던 작가의 빈 동상 좌대 설치작품 ‘공인’을 6분의 1로 축소한 모형 작품은 처음 공개되는 화제작이다. 좌대 위에 특정 위인을 세우는 기념비적 상이 아니라 좌대 아래를 지탱하는 300여명의 민중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아트선재 출품작에는 아래 민중의 조형상에 모터를 달았다. 스미소니언의 실제 조형물보다 한단계 더 진전돼 민중이 발 맞춰 움직이면서 좌대를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도호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똥별’의 모형.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제이콥스 홀 건물에 실제로 놓았던 설치작품 ‘별똥별’을 32분의 1 스케일로 재현했다.

스페이스2에는 한국과 영국에서 철거된 공동주택단지 영상이 흘러간다. 대구 동인아파트와 런던 주택단지 로빈 후드 가든의 철거 영상인데, 탁본을 뜨듯 수직축 수평축으로 영상을 잡아서 냉정하고 담담하게 철거 현장에 묻은 원래 주민의 삶의 흔적과 흘러간 세월을 기록하고 드러낸다. 집의 이동과 세월의 흐름이라는 시공간적 흐름을 한 화면에 담은 이 작업들은 기억과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집약한 수작으로 비친다.

서도호 작가의 작업들은 흔히 천으로 된 집·사물 작업과 수천 수만의 군번표, 소인형 같은 군상들의 스펙터클한 집적물로 표상된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외양 이면에 압축성장기 한국의 획일적인 집단주의와 언제든지 자리를 떠서 환난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난민의식의 맥락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이런 과거의 굴레 같은 요소들을 새로운 시각 콘텐츠의 토대로 계속 활용해왔다. 특히 대구와 런던의 철거 대상 아파트의 단면들을 포착한 최근 영상 작업들에서 사진측량, 입체 스캐닝, 타임랩스 사진, 드론영상 등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선주민들의 생활 공간 역사가 깃든 다층적인 이미지 서사를 만든 것은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기존 작품 틀과는 차별성을 지닌 이 동영상 근작들은 작가 작업의 핵심 화두인 기억과 공간이 앞으로 도시사 맥락에서 심층적으로 탐구될 것임을 암시한다.

올해 4월부터 미국 워싱턴디시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 앞에 설치돼 화제를 모았던 서도호 작가의 빈 동상 좌대 설치작품 ‘공인’을 6분의 1로 축소한 모형 작품.

작가는 지난 16일 전시 설명회에서 말했다. “좌충우돌하면서 언론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이나 정보보다는 조금 심화된 것들을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공부하는 게 목적인 거예요. 사실은 목적 자체가 없는 프로젝트인데, 모순적으로 서울과 북극을 잇는 다리를 지을 수 있다, 그 안에 집을 지어야겠다는 어떤 강한 신념, 자기 최면을 걸면서 하는 프로젝트인 거죠. 다른 스페큘레이션 시리즈들도 그러한 성격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화랑, 미술관에서 전시해온 천으로 만든 집 작업이 저를 대표하는 작품처럼 돼버렸는데 빙산의 일각이죠. 전시된 스페큘레이션스 시리즈들이 제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것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60대인 그가 아이디어북에 쌓아둔 것만 해도 여생 동안 작업할 거리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작가의 답변을 들으면 앞으로도 이런 사유의 전략과 방법론으로 쟁여놓은 거리들을 재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담론이 필요한 시대에 목적점이나 지향점 없이 스페큘레이션의 사유가 소재를 달리해 마냥 공학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과 아쉬움도 남는다. 11월3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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