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도 의사도 아우성…"응급실 대란? 아직 시작도 안했다"
정부 대책없는 대책만…유승민·안철수도 "尹대통령 결단해야"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 "지금 이마 찢어져서 피나는 정도는 응급 축에도 못 껴요. 더 큰 문제는 만약 CT(컴퓨터단층촬영)상 뇌출혈이 심해도 당장 수술할 신경외과 의사도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한 의대 교수는 최근 전해진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 전 위원장은 지난 22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새벽에 넘어져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응급실 22군데에 전화를 걸었지만 퇴짜를 맞은 경험담을 공개했다.
김 전 위원장은 "119가 와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일으켜 겨우 옛날에 자주 다니던 병원에 가서 신분을 밝히고 응급실에 갔는데 의사가 아무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자신이 정치인이라는 신분을 밝히고도 '응급실 뺑뺑이'를 경험했다고 털어놓은 김 전 위원장의 말처럼 현재의 응급실 상황은 소위 'VIP 환자'에게도 예전처럼 대접을 해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24일 자신의 SNS에 "최근 위장 출혈 증상을 보여 제발로 1000병상이 되는 대형병원을 찾았던 환자도 지혈해줄 소화기내과 의사가 없어 치료가 늦어져 결국 사망했다"며 "위장 출혈은 대부분 내시경으로 쉽게 응급처치가 가능하다. 이런 피해자는 이분뿐이 아닐 것"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의료 공백이 반년이 지나고 있는 시점에 이런 상황들이 터지게 된 것은 응급의학과를 비롯한 모든 임상과 전문의들이 체력적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응급실에 남아 고군분투하던 의사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휴직·사직을 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고, 배후 진료를 담당하는 과들도 최소 인원으로 진료, 수술, 당직 등을 도맡다 보니 더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 대학병원 외상외과 교수는 "응급실만 봐도 옛날보다 환자는 줄었지만 의사는 더 줄었다"며 "솔직히 다 너무 지쳐있다. 응급실에서 연락이 와도 몇몇 과에선 아예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받지 않고 있다. 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못 받는다. 우리도 환자 10명 오면 5명은 튕겨보낸다"고 말했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도 23일 자신의 SNS에 "현재 내 업무는 응급 진료 체계 붕괴의 상징이다. 나는 권역응급센터에서 혼자 근무한다. 여기는 하루 육십 명 정도를 진료하는 서울 한복판의 권역센터"라며 "매 듀티(당직)마다 의사는 나 혼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달도 못 버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6개월이 넘었다"며 "이 붕괴는 확정되었다. 일말의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2월 의료 공백이 촉발된 이후 의료계가 계속 경고해온 상황이다. 정부가 군의관과 공보의, 간호사를 더 투입한다고 해도 현재의 공백은 메울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는 의료 붕괴가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빅5 병원의 한 필수과 교수는 "당시 앞으로 닥칠 일이 공포스럽다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일부에 불과했던 응급실 뺑뺑이는 일상이 되어버리고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누구도 이사태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예외는 없다. 대란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말했다.
정부도 현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지난 22일 중대본 브리핑에서 중증 응급 환자의 진료 공백을 최소화하는 추가 대책으로 △인건비 등 현장 의료진 지원 강화 △경증환자 지역 병·의원 분산 △비상진료 우수 기관에 추가 인센티브 지원 △수가 인상 통한 후속진료 역량 강화 △이송체계 정비 등을 내놨다.
하지만 현장에선 이런 대책으론 의료 붕괴를 막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의과대학 교수는 "의사들의 사직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수가 인상, 인건비 지원 다 의미 없다. 생을 바쳐 환자의 생을 살리는 게 행복했던 의사들은 정부와 국민들에 상처입었고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말했다.
강원도 권역응급센터에서 응급의학과 치프(의국장)로 일하던 사직 전공의도 최근 '선배님 전상서'를 통해 "수련을 안 받는 게 합리적임에도 십 원 한 장 안 되는 감사 인사와 사람을 살렸다는 '바이탈 뽕'에 취해 몸과 마음과 젊음을 갈아넣던 우리였다"며 "그런데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공부를 못해서 바이탈과를 한다는 '낙수의사' 취급을 받았고 내가 살려낸 환자들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응급실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이탈과를 무시하는 풍조가, 의사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이, 착취로 얼룩진 수련 시스템이, 교과서대로 진료하면 빚더미에 앉는 수가 지불체계가 이대로 유지된다면 내년 3월이든 내후년 3월이든 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정치권에서도 정부에 현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지금 가장 급한 일은 의료붕괴 사태다. 의료가 무너져 국민 생명이 위험에 처한 이 상황보다 지금 더 위급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정부가 살리겠다던 필수, 응급의료부터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윤석열 대통령이 결자해지해야 한다"며 "지금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의료붕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대통령 뿐"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도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의대생과 전공의가 돌아와 더 이상의 파국을 막으려면 우선 정부가 의대 증원 과정에서 잘못한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며 "이제는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정부의 반성과 결단이 없으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세계적인 수준의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sssunhu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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