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국제고와 신성현, 그리고 ‘헝그리 정신’ [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야구]

김양희 기자 2024. 8. 2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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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처음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을 때 신성현의 모습. 한화 이글스 제공

원래 어릴 적 했던 운동은 수영이었다. 5~6년 정도 수영만 했는데 덜컥 비염에 걸렸다. 수영장에 들어가면 숨이 턱 막혔다. 1년 쉬는 기간 야구 교실에 나갔다. 야구의 매력에 빠졌고, 야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조금 늦게 시작한 야구. 야구 실력은 잘 늘지 않았다. 덕수중 졸업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굳이 야구가 아니더라도 일본 문화와 일본어를 익히는 게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다. 일본에서 입학한 고교가 교토국제고였다.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여서 야구 일본 유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006년 당시만 해도 한국인 야구 선수가 8명가량 있었다.

열여섯살 사춘기 소년의 유학 생활은 힘들었다. 1학년은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해야만 했다. 물통 나르는 것부터 식당 청소, 빨래 등이 모두 그의 몫이었다. 모든 잡일이 다 끝나면 새벽 2~3시였다.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운동장에 남은 공이 없는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오전 수업 때 졸고 있는 게 야구부 선배들에게 들키면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기도 했다. 규율이 그만큼 셌다. 낯선 땅, 낯선 언어 환경에서 버티기로 시작된 오기와 끈기는 어느덧 간절함으로 바뀌어갔다.

그가 교토국제고에서 처음 만난 지도자는 재일교포였다. “나름 신경을 많이 써주시고, 붙잡고 열정적으로 훈련을 많이 시키신 분”이었다. 교토국제고는 “자율훈련을 바탕으로 각자 알아서 열심히 하는 분위기”였고, 그때 그의 목표는 구체화됐다. 야구에 전념하게 된 터닝 포인트도 됐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새벽까지 훈련을 이어갔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투수였지만 일본 유학 뒤 “구속이 안 나와서” 야수로 전향했다. 3학년 초에는 교토 지역 신문에도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야구 유망주로 꼽혔다. 아쉽게도 고시엔(일본고교야구선수권)은 지역 예선 8강까지밖에 못 갔다.

2008년 가을, 그는 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카프에 4라운드로 지명됐다. 당시 <닛칸 스포츠> 등 일본 언론은 “교토국제고 1학년 가을부터 팀의 4번 타자를 꿰찼고 고교 통산 30개 홈런을 때려냈다. 115m를 던질 수 있는 강한 어깨와 50m를 6초6에 주파하는 빠른 발까지 있다”고 그를 소개했다. 히로시마 구단은 양손 포구의 수비 기본기, 볼을 무서워하지 않는 근성 등에 후한 점수를 줬다. 간절함이 현실로 구현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본 프로 1군의 벽은 높았다. 결국 2군에만 있다가 2013년 말 방출됐다.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거쳐 김성근 감독과의 인연으로 2015년 한화 이글스에서 KBO리그에 데뷔했다가 두산 베어스 등을 거쳐 지난해 33살 이른 나이에 은퇴한 신성현 현 두산 전력분석원의 이야기다. 교토국제고를 사상 처음으로 여름 고시엔 우승으로 이끈 고마키 노리쓰구 감독이 기억하는 첫 제자, 신성현의 ‘헝그리 정신’이기도 하다.

2007년 4월 교토국제고 야구부 정식 코치가 되고, 이듬해 감독이 된 고마키 감독은 지난 3월 일본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신성현을 가르치며 내 서랍을 더 많이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신성현을 가르치며 인상 깊었던 것은 헝그리 정신이었다. 힘든 연습도 마다치 않고 열심히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신성현은 “1학년 말 즈음 내야 수비 연습을 하는데 자꾸 실책을 범하니까 야구장에서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대로 글러브를 내던지고 숙소 근처 체육관에 가서 혼자 벽치기를 하면서 공 받는 연습을 했다”면서 “이후에 감독님이 마음을 열어주셨다. 이번에 우승 축하 문자 메시지도 보냈다”고 했다.

지금은 구단 프런트로 새 삶을 사는 신성현의 야구는 거듭해서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힘든 시절을 견뎌냈던 기억으로 버텨냈다. 비록 프로 생활은 ‘가능성’으로만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의 ‘헝그리 정신’은 간절함이었고, 절실함이었다. “야구를 진짜 좋아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야구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한 ‘전력분석원’ 신성현이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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