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마저 이과생이 더 잘하는 사회는 왜 위험한가[노원명 에세이]
문과적 적성과 문과 직업에 대한 야심으로, 혹은 수학도 잘 하지만 국어를 더 잘해서 문과를 택하던 시대는 아주 오래전에 끝났다. 따라서 국어조차도 이과가 문과보다 잘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입시전문가에게 “같은 대학에서 이과 주요 학과와 문과 주요 학과에 들어오는 학생들 사이에 학력 격차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컴퓨터공학과 신입생이 경영학과 학생보다 국어 마저 평균적으로 더 잘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대입에서 이과생들에 의한 ‘문과 침공’이 일어나듯 구직에서도 ‘문과 직업 침공’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가령 학부에서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로스쿨에 진학해 판검사가 되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리라 확신한다. 과거 같으면 애당초 문과 전공을 택했을 성향이지만 ‘점수가 아까워’ 공대에 간 인재들이 직업은 원래 적성대로 문과 계통에서 찾는 현상 말이다.
글을 다루는 기자는 오랫동안 가장 ‘문과적’ 직업의 하나로 인식되어왔다. 여전히 신입 기자 중에는 문과 출신이 많다. 그러나 최근의 입시 결과는 사실과 개념을 글로 표현하는데 소질이 있는 인재가 이공계열에 더 많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학력과 문장력이 평균적으로 일치한다고 보면 그렇게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신문사 입사에서 공대 출신이 주류를 점한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다. 물론 공대 출신이 직장으로서의 신문사에 매력을 느낀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이런 융합형 인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이과에만 인재가 몰리고 그 결과 문과 출신이 담당해야 할 자리마저 이과 출신들이 차지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중국 같은 나라에선 이과 출신이 줄지어 최고 지도자가 되고, 마거릿 대처처럼 이과 출신이면서 세기의 지도자가 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많은 경우 문과형 인재가 정치를 맡아왔다. 지금처럼 이과에 인재가 몰리는 구조에선 향후 20~30년 이내에 한국 정치엘리트는 대학 학부 기준으로 이공계 전공자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그게 왜 문제인가.
문과적 소양은 하루아침에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장기간의 교육을 통해 육성되는 것이고 개인의 자질에 따라 성취에 큰 차이가 난다. 그것은 글과 사람과 관계에 대한 탐색의 학문이며 우리 공동체를 설계하는 안목의 원천이 된다. 갈등의 조율을 통해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도 문과적 자질이다. 정치인의 상상력을 샘솟게 하는 것도 역사와 철학이다. 공대가 약한 나라는 가난해서 망하고 문과가 약한 나라는 전쟁으로 망한다.
문과적 소양으로 충만한 엘리트가 정치를 맡던 시대는 사실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틀을 기초한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질서를 복구한 빈 체제 주도자들은 당시 유럽의 귀족계층이었다. 헨리 키신저는 저서 ‘리더십’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귀족주의 정치가와 외교관 등이 승전국과 패전국을 가리지 않고 만나, 민주주의의 소란과 다툼이 없이 예의와 품격을 갖추고 논쟁을 벌이면서 모두가 합의한 근본에 따라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던 위트레흐트조약과 빈조약의 시대는 갔다.” 귀족들 전유의 문과적 교양력이 세계를 굴러가게 하던 시대는 19세기에 끝났다.
20세기 이후는 이전에 귀족들이 맡던 역할을 주로 중산층 출신의 탁월한 능력자들이 대행해 오고 있다. 귀족주의(aristocracy)가 능력주의(meritocracy)로 대체된 것이다. 능력주의 시대에 세계는 더 극단화되고 위험해졌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위대한 지도자들이 나와 세계를 파국에서 구하곤 했다. 말년의 리콴유는 키신저를 상대로 21세기 정치에 대해 이런 걱정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처칠, 또 다른 루스벨트, 또 다른 드골이 탄생할 것 같지 않습니다.” 현대 정치인들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얕은 이해, 문과적 교양력의 쇠퇴를 지적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키신저 본인의 21세기 정치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19세기 귀족들이 자신에게 많은 기대가 걸린 것을 잘 알았고 20세기 능력자들이 봉사의 가치를 추구했다면,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의무를 논하기보다는 자기표현이나 자신의 발전을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게다가 이들이 형성된 배경인 기술적 환경은 지난날 지도자와 국민을 한데 묶어두던 바로 그 인격과 지성이라는 자질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22대 한국 국회의원들의 평균적 교양력을 1대 제헌의회 의원들과 비교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들이 나눈 토론의 논리와 언어 수준, 문장력 등을 비교하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나는 국회의원 교양력이 1대 부터 22대까지 꾸준히, 점진적으로, 일관되게 하락해 왔을 것이라 짐작한다. 1대 제헌국회 의원들은 대부분 귀족적, 한자적 교양력으로 충만한 지적 배경을 보유하고 있었다. 22대 의원들의 인격과 지성을 거기에 대면 대학생과 초등학생 차이쯤 될까.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인 중에서 예외적 교육 기회를 가졌던 이승만은 논외로 치고, 박정희의 친필 메모에서 느껴지는 정돈된 사고력과 문장력, 기획력, 교양 수준을 21세기 이후 한국 대통령 중에서 비슷하게라도 따라간 사람은 그와 같은 세대였던 김대중 말고는 없다.
그나마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주류는 대학에서 문과 계열 전공을 택해 책권이나 읽었던 세대에 속해 있다. 그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는 문과와 이과 사이에 인재 균형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치권의 문과적 교양력은 계속 쇠퇴하는 중이다. 그것은 문과의 최고 인재들조차 정치를 외면하게 된 세태와 무관치 않다. 정치를 지망하는 사람의 자질은 천박해지고 자존심이 기초가 되어야 할 애국심은 희귀해졌다.
미구에 이과 출신들의 ‘정치 침공’이 본격화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대학 시절에 역사와 철학,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색이 없었던 사람들이 다수가 되는 의회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탁월함은 평균을 초월하지만 집단의 수준은 평균에 수렴하는 것이다. 문과적 교양이 무시되는 사회는 귀족주의가 끝나고 열병처럼 번진 전체주의처럼 위험하다.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려면 문과형 인재가 문과 전공을 택해야 하고 공들여 쌓은 교양력을 밑천삼아 정치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터무니없는 이과 우위는 곤란하다. 프랑스의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국립행정학교(ENA) 같은 문과 엘리트 양성을 위한 특수 대학을 도입해야 할까. 아니면 로스쿨을 없애고 다시 학부에 법과 대학을 만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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