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매국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다니… 기가 찬 친일파의 재산 축적기
이완용, ‘친일 3관왕’으로 최대 현금 부호가 된 매국노의 대명사
임금(고종)의 형 이재면, 이완용보다 일왕 하사금 5배 더 받아
을사오적 이근택, 아부와 처세술로 군부대신까지 올라 일본에 기밀 넘기고 거금 챙겨
박영효, 적이었던 이완용과 손잡고 일제 앞잡이 돼 안정적으로 재산 축적
‘식민지 조선 1호 부자’ 박흥식, 반민특위 체포 1호 ‘수면부족, 신경쇠약’ 이유로 103일 만에 풀려나
▲정미칠적(7명, 1907년 7월24일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 : 이완용(내각총리대신), 송병준(농상공부대신), 이병무(군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조중응(법부대신), 이재곤(학부대신), 임선준(내부대신)
▲경술국적(8명, 1910년 8월 대한제국에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찬성 및 협조) : 이완용(내각총리대신), 윤덕영(시종원경), 민병석(궁내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조중응(농상공부대신), 이병무(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조민희(승녕부총관, 이완용 처남)
일본제국주의를 도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1905년 을사오적, 1907년 정미칠적, 2010년 경술국적(8명)에 한 번 이상 이름을 올린 고관대작 친일파는 14명이다. 이 중 두 번 이름을 올린 ‘친일 2관왕’은 4명(박제순, 이병무, 조중응, 고영희)이다. 세 차례 모두 관여한 ‘친일 3관왕’도 있으니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이다. 나라를 파는 데 앞장 선 이완용은 그 대가로 떼돈을 벌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이듬해인 1911년 1월13일 ‘은사공채’ 15만원(현재 가치 30억∼150억원)을 받았다. 당시 군수 월급(50원)의 3000배나 되는 상금이다.
이완용은 조선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으로 10여년 부역하면서 연 수당 1600∼3500원을 받기도 했다. 특히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 멸망을 전후해 내각총리대신으로 잔무를 처리한 수당(60원)과 퇴직금(1458원 33전)까지 살뜰히 챙겼다. 그는 고종과 순종이 하사한 금전, 친일 대가로 받은 비공식적 금전 등까지 합쳐 곳간 규모를 꾸준히 불려 죽기 전인 1925년엔 친일파 민영휘에 이어 한국인 부자 2위로 기록됐다. ‘경성(서울) 최대 현금 부호’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완용과 이재면 등 대표적인 친일파 30명의 ‘친일 재산’과 ‘친일 연대기’를 기록한 책 ‘친일파의 재산’(북피움)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인 김종성 역사학자(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는 “이완용은 관료 출신치고는 이례적으로 자산 순위 1, 2위를 다투는 갑부 반열에 올랐다. 친일매국이 그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것”이라고 일갈한다.
책에 따르면, 친일에 관한 오해는 ‘친일은 부득이했다’는 논리다. 일제의 위협과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을 뿐이란 주장이다. 물론 일제의 압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압력은 일본군위안부와 강제 징용·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압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피해자들에 대한 압력은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상류층이나 지식인 출신 친일파들에 대한 압력은 이와 달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친일을 했다고 변명하는 사람 대다수는 실제로 일정한 불이익을 감수하고 일본의 요구를 어느 정도 거부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저자는 그들의 변명이 새빨간 거짓말이고, 친일의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기득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음을 낱낱이 고발한다. 아울러 전쟁 등 단독으로 대한제국을 쓰러뜨리지 못한 일본이 손쉽게 한국을 강탈하고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친일파들의 헌신과 조력 덕분이었다고 강조한다. 이를 통해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묻는다.
이완용 외에 ‘친일파의 재산’ 속 일부 사례를 요약해 소개한다.
고종의 형 이희(이재면)는 대한제국 멸망(1910.8.29) 4개월여 뒤에 은사공채를 받았다. 고종의 다섯 째 아들 이강(이평길)과 함께 가장 많은 83만원씩 받았다. ‘대한제국 임원’ 이완용이 더 많은 부역행위를 했지만 ‘총수 일가’인 이재면이 더 많은 사례금을 받은 것이다. 이재면은 자기가 왕이 될 수도 있었던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다. 1910년 8월 합병조약 체결을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을 때 황족대표로 참석했다.
대한제국 영토와 백성을 일본에 넘긴 대가로 그는 83만원짜리 국채증서와 이자 수령권을 획득했다. 당시 은사공채는 ‘5년 거치 50년 상환’ 조건으로 지급됐다. 일제 지배가 35년 뒤 종결될지 몰랐던 시기라 50년 뒤 원금 상환 조건으로 발행한 것이다. 6개월마다 연 5% 이자가 은사공채 대상 친일파들에게 지급됐다. 이자를 지급하는 주체는 일왕과 일본 정부이지만, 실제로 돈을 뜯기는 쪽은 우리 백성이었다. 이재면은 신분상 특권도 함께 보장받았다. 이강과 함께 공(公)에 봉해졌고 일본 육군 중장의 예우를 받았다.
충주의 무인 가문 출신인 이근택은 17세 때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1882년 임오군란을 피해 충주로 피신한 중전 민씨(명성황후)에게 매일 신선한 생선을 갖다 바쳤다. 바다가 먼 충북 땅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공으로 중전 민씨가 환궁한 뒤 이듬해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됐다. 이근택은 이후 을미사변(1895.10.8)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유품을 일본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하자 거액을 주고 구입해 고종에게 바쳤다. 그렇게 대한제국 황제의 신임을 얻어 군부대신(지금의 국방부장관) 자리까지 올랐지만 을사늑약의 주역이 됐다.
1908년 11월에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이 돼 일본이 한국 산림자원을 장악하는 데도 기여했다. 일제는 경제적으로 두둑히 보상해줬다.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 이근택이 1919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매년 수당 1600억원을 지급했다. 귀족(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도 주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2개월 전 기밀비로 30만원이란 거금을 받았다. 군부대신이란 자가 조정의 정보를 캐내 일본에 전달하는 첩자 활동까지 하면서 엄청난 뒷주머니를 챙긴 것이다.
철종의 부마(사위)였던 박영효는 당초 이완용과 사이가 나빴지만 일본은 그를 우호적 인물로 평가하고 위상을 이완용보다 높게 설정했다. 1910년 한국 강점 뒤 이완용에게는 백작 작위를 줬다가 19020년 후작으로 높인 데 비해, 박영효에게는 처음부터 후작 작위를 줬다. 병합 이듬해 은사공채도 이완용 15만원보다 훨씬 많은 28만원을 지급했다. 당시 군수 월급(50원)의 5600배를 일왕 하사금으로 준 것이다. 대한제국을 헐값에 넘겨받는 데는 이완용의 역할이 절실했지만, 이후에는 박영효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 민심을 억누르는 게 급선무였던 만큼 왕실 일원인 박영효는 선전 도구로 제격이었다.
일본은 한국 특권층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두 사람을 앞세웠다. 박영효는 조선귀족회장, 이완용은 중추원 부의장이 됐다. 1907년 고종 퇴위 때만 해도 대립관계였던 두 사람은 조선귀족회가 설립된 1911년부터 달라졌다. 이익 앞에선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았던 셈이다.
박영효는 이후 안정적으로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1913년 조선무역회사를 설립하고, 1918년 경제침략 기관인 조선식산은행의 이사가 됐다. 1919년 경성방직 사장, 1920년 동아일보사 사장도 됐다. 1921년부터 5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일하며 연봉 3000원을, 1926∼1939년 사망 때까지 중추원 부의장으로 연봉 3500원을 받았다. 1932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제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됐다. 일제는 그가 죽자 욱일대수장을 하사했다.
박흥식은 친일청산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해방 공간에서 국민적 공분을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다. 그가 미움을 산 것은 화신백화점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조선 1호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저돌적인 친일의 결과로 거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세상을 분노케했다. 당시 기업들의 친일은 현금 기부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나 박흥식은 글과 말로도 친일을 했고 일본군에 비행기를 제공하는 회사 설립에도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는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고 사흘 뒤인 1949년 1월 8일 체포됐다. 반민특위 체포 1호 사건으로 상징적 의미가 컸다. 하지만 수면 부족과 신경쇠약을 이유로 구속된 지 103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A급 친일파가 유유히 빠져나가자 재판부를 향한 국민적 분노가 쏟아졌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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