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로열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 된 한국인 발레리노, 초고속 승급의 비결은[스프]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4. 8. 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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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가장 힘들었던 생일날…힘들어도 퇴근길 5분만 울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탄광촌 소년 빌리는 로열발레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에 오디션을 보러 갑니다. 빌리의 오디션은 온 마을의 관심사입니다. 광부인 아버지의 동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은 빌리와 아버지의 생애 첫 런던행 여비가 됩니다. 런던에 간 빌리는 우여곡절 끝에 로열발레학교 오디션에 합격하고, 영화는 훗날 성인이 된 빌리가 무대 위에 도약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성인 빌리 역은 실제로 로열발레단 주역 무용수였던 아담 쿠퍼가 맡았습니다.

로열발레학교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문 발레단인 영국 로열발레단의 부설 학교입니다. 로열발레단은 따로 입단 오디션 없이 로열발레학교 출신들로만 충원합니다. 최근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출연한 로열발레단의 발레리노 전준혁(26세)을 만나고 저는 '빌리 엘리어트'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로열발레학교의 첫 한국인 남학생으로, 로열발레학교 졸업 후 로열발레단에 입단했습니다. 또 한국에서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이 공연될 때 빌리 역으로 선발됐던 인연도 있습니다.

 

로열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 전준혁

전준혁은 2017-2018 시즌에 로열발레단 수습 단원으로 시작해, 2018년에 아티스트, 2022년 퍼스트 아티스트, 2023년 솔리스트, 2024년 퍼스트 솔리스트로 승급했습니다. 팬데믹 때문에 제대로 공연을 하지 못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매년 승급했으니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입니다. 한국인 발레리노 최초 기록입니다.

발레단마다 조금씩 무용수 등급의 명칭이 다른데, 로열발레단의 퍼스트 솔리스트는 가장 높은 프린시펄(수석 무용수) 아래 등급입니다. 로열발레단은 프린시펄-퍼스트 솔리스트-솔리스트-퍼스트 아티스트-아티스트(군무)-수습 단원의 순으로 등급이 나뉩니다. 로열발레단은 또 '프린시펄 캐릭터 아티스트'라는 등급이 있는데요, 춤이 아닌 캐릭터 연기만 전문적으로 하고, 보통 은퇴한 무용수나 연륜이 있는 무용수가 맡습니다.

그는 고모 세 명이 모두 발레를 해서,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발레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고모가 하는 발레 학원에서 3살 때 발레를 시작했고, 5살 때 콩쿠르에 나가면서 평생 발레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 역으로 선발됐지만, 노래와 연기, 탭댄스까지 하느라 발레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싫어 그만두는 바람에, 뮤지컬 무대에 서지는 못했습니다.
 

로열발레학교 오디션 못 갔지만 전액 장학금 입학

선화예중을 다니던 2014년, 로잔 콩쿠르에 출전해 결선에 진출했습니다. 콩쿠르 기간에 그를 눈여겨봤던 로열발레학교 교장이, 로열발레학교 입학 오디션에 응시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그때 뭐라 하셨는데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못 알아들었어요. 오디션 보러 오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못 알아들어서 이메일도 안 보내고 오디션 신청도 안 했죠.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로잔 콩쿠르 쪽에 얘기해서 저희 아버지 이메일을 받아서 따로 연락을 주셨어요. 그런데 영국이 돈이 많이 드는 국가이다 보니, 한 달 동안 체재비를 쓰면서 오디션 보러 가는 건 힘들겠더라고요."

로열발레학교 입학 오디션은 4차에 걸쳐 한 달간 진행되는데, 전 세계 학생들이 응시합니다. 영화 속 빌리는 어떻게든 여비를 마련해 런던에 갔지만, 한국에서 런던은 너무 멀었습니다.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커서 런던에 갈 수 없다고 했더니, 교장은 비디오 심사로 입학 오디션을 대체하겠다고 했습니다. 클래스 영상과 작품 영상들을 보냈더니, 얼마 후 합격 통지가 왔습니다. 정말 기뻤지만, 이번에도 선뜻 가겠다 하지 못했습니다.

"학비가 너무 비쌌어요. 그 당시에 학비만 3만 8천 파운드인가 그랬어요. 기숙사비, 생활비까지 합치면 1년에 1억 정도는 들겠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이 장학금을 좀 줄 수 없느냐 했더니, 교장 선생님이 처음에는 장학금 잘 안 준다, 특히 외국인은 더 힘들다, 그랬어요. 그런데 한 1주일 정도 회의를 하셨나 봐요. 다시 연락이 왔어요. 장학금 주겠다, 후원해 줄 사람을 찾았으니 꼭 우리 학교에 왔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비디오 심사만으로 로열발레학교에 합격하고, 아시안 남학생 최초로 전액 장학금 수혜자가 됐습니다. 로열발레학교 교장이 로잔 콩쿠르에서 1주일 이상 그를 쭉 지켜보면서 놓치기 아까운 인재라고 판단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가 입학한 로열발레학교는 '어퍼 스쿨'로,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3년 과정입니다. 로열발레단은 따로 입단 오디션 없이 이 학교 졸업생 중에 단원을 충원합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등장한 로열발레학교는 이보다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5년 과정 학교입니다.)

출처 : 전준혁 인스타그램, photo by @dancersdiary
 

슬럼프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다행히 좋은 친구들을 만나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생활은 즐거웠지만 그는 줄곧 시험대에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로열발레학교는 매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학생은 진급할 수 없고, 무사히 졸업한다고 바로 꽃길이 열리는 것도 아닙니다.

학교 동기가 30명 정도인데, 이 중 로열발레단 수습 단원으로 선발되는 인원은 5~6명 정도에 불과하고, 수습 1년을 마치고도 이 중 1~2명은 탈락합니다. 로열발레학교 입학부터 시작해, 단계별로 정말 치열한 경쟁을 뚫은 소수만이 로열발레단 정식 단원이 되는 겁니다. 전준혁은 그 단계를 모두 통과해, 로열발레단의 첫 한국인 남성 단원이 되었습니다. 발레단에서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퍼스트 솔리스트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보통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승급하고 나서 지금이야 좀 마음이 편한데, 이번 시즌 끝내기 전까지 마음이 계속 좀, 부담감도 있고, 증명해야 한다는 불안감, 압력 같은 게 있었죠. 제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항상 최선의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이제 좀 마음이 놓여요."

"지금까지 해온 걸 돌아보면 이때는 슬럼프였다, 이런 때가 있었나요?

"슬럼프는 없었던 것 같고, 항상 슬럼프였나 싶기도 하고. 항상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었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슬럼프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슬럼프여서 이 동작이 왜 안 되지? 이런 생각보다는, 안 되면 그냥 될 때까지 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요.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꽤 많았는데, 슬럼프여서 주저앉아서 연습을 못 하게 되고 그랬던 경험은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안 되면 그냥 될 때까지 한다'는 말대로, 그는 '연습 벌레'였습니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토한 적도 있고, 몇 번 쓰러져서 구급차 신세를 진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극단까지 몸을 혹사하지는 않으려고 조심하는 편입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발레에 소질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발레는 몸치라도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예술이라서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출처 : 전준혁 인스타그램, photo by @dancersdiary
 

로열발레단에서 7년, 생일날 처음 울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못 이겨내죠. 사실 이번 시즌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솔리스트 승급하고 나서 발레단에서도 저를 굉장히 응원하지만,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주변에서 '쟤가 왜 이런 배역을 받았을까? 어디 잘하나 볼까?' 이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들 저를 축하해 주고 응원해 준 것 같은데, 그냥 저 혼자 스스로 정신적으로 몰려 있다 보니까. 몸이 아픈데도 계속 춤을 춰야 하는 부분이라든지, 제가 좋아하지 않는 작품인데 행복하게 춤을 춰야 하는 부분이라든지..."

그는 올해 2월 21일을 회상했습니다. 마침, 전준혁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날 생일 파티를 하기는커녕 무려 다섯 개 배역의 리허설을 해야 했고, 저녁에는 또 다른 작품의 공연 무대에 서야 했습니다. 아침 9시 반에 시작해 점심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리허설이 계속됐습니다. 15분 휴식 시간에 점심을 대충 쑤셔 넣고, 어머니와 5분간 통화했습니다.

"허리는 너무 아프고, 오늘 해야 하는 공연은 너무 하기 싫고, 정말 진저리가 나더라고요. 그날은 일어나기가 싫었어요. 그런데 공연은 해야 하고, 저를 대신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그 공연은 현대 작품인데 한 20분 정도, 정말 숨 고를 틈이 없어요. 그날이 공연 셋째 날이었던가 했는데, 부모님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죠. 전화할 때는 울 수도 없고... (당시를 떠올리며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끊고 복도에서 그냥 눈물이 너무 나서 막 울었어요. 제가 발레단에 7년 다녔는데 그때 처음 울었어요."

친한 동료가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에 그는 자신의 심정을 두서없이 털어놨습니다. 난 이 공연하기 싫고, 발레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먼 타지에서 왜 이렇게 고생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춤춘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 공연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 관객을 위해서 얼마나 더 힘들게 춤춰야 하나,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계속 든다고요.
 

나는 불행했지만 내 춤을 본 관객은 행복하다 했다

힘들고 하기 싫어도 무대에는 서야 했습니다. 공연은 어찌어찌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야말로 지친 마음과 몸으로 극장을 나서는데, 극장 앞에서 기다리던 관객들이 그를 알아보고 건넨 이야기에 또 마음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관객분들이, 제가 무대에서 너무 행복하게 춤추는 모습에 자기도 행복했다고 말을 건네주시는데, 그것도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냥 스스로 마음이 아팠어요.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거짓된 마음으로 춤을 춰야 할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관객분들은 다행히도 행복하게 봐주시니까 행복하게 춤출 수도 있는 것 같고, 무대에서 행복하게 춤을 추다가도 무대 내려오면 정말 그냥 쑥 힘이 다 빠져버리는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그때가 진짜 저는 발레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 어떤 작품을 하셨는데요?"

"현대 작품이었는데, 아프리카 전통춤에서 영감을 받은 춤이어서 굉장히 리듬과 행복한 에너지가 안무 포인트였어요. 그래서 정말 행복하게 그냥 춤만 추는 그런 작품이었는데, 정작 저는 너무 불행해가지고."

"그래도 관객들은 행복한 에너지를 얻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진짜 다행이다 생각했죠. 제가 책임감은 좀 있거든요. 얼마 내고 티켓 사서 왔는데, 그런 걸 보여주면 안 되죠. 프로니까."
 

퇴근길 5분만 울었다... 그리고 찾아온 기회

그즈음 그는 자주 울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퇴근길 딱 5분만이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힘든 건 이겨낼 수 없다'라고 했지만, 그렇게 그 시기를 버텨냈습니다.

"제가 힘드니까 극장 근처 걸어갈 수 있는 곳에 방을 얻어서 사는데, 이번 시즌에는 정말 눈물 흘리면서 집에 가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출근하고, 그런 날이 많았어요. 제가 '내 사랑 내 곁에'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 노래를 부르면서 가고, '퇴근길에만 울자' 다짐했죠. 퇴근길이 짧아서 다행이었어요. (웃음)"

10년 가까이 되어가는 영국 생활, 그동안 슬럼프로 낭비할 시간도 없이 숨차게 달려왔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힘들었던 시기,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며 버텼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지난 4월, 프레데릭 애쉬튼이 안무한 '랩소디'에서, 출연을 포기한 동료 무용수 대신 주역을 맡게 된 겁니다. 다른 출연자들보다 뒤늦게 리허설에 합류했지만, 그는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쏟아냈습니다. 관객들의 호응도, 리뷰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어진 '백조의 호수'에서는 베노 역할을 맡아 다시 한번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베노'는 '백조의 호수' 로열발레단 버전에만 있는 역할인데, 왕자의 친구로 무대에 나와 있는 시간도 길고 춤이 많은 주요 배역입니다. 그는 '로열발레단에서 베노 역할은 내가 최고'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백조의 호수' 공연 기간 도중 케빈 오헤어 로열발레단 단장과 면담하면서, 승급을 통보받았습니다.

출처 : 전준혁 인스타그램, photo by @dancersdiary
 

승급 안 되는 줄 알았다... 면담 끝에 단장이 한 말은

로열발레단은 승급 오디션이 따로 없고, 단장이 평소 활동을 감안해 승급 여부를 결정하고 시즌 막바지 1대 1 면담을 통해 통보합니다. 그는 30분 정도 걸리는 면담에서 이전에는 먼저 '준, 이번에 승급했어. 축하해!' 하고 나서 이번 시즌 피드백을 받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번 시즌 어땠냐'는 질문부터 해서 '승급은 안 되는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제가 '한 불평' 했죠. 이런 배역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안 줘서 아쉽다, 그냥 나도 잘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배역을 많이 받았는데도 욕심이 있어서. 또 이번에 맡았던 배역 중에서 기분 좋게 했던 배역들, 연기를 더 할 수 있어서, 혹은 안무에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던 부분들을 얘기했죠. 그런데 맨 마지막에 단장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너를 승급시킬까 하는데, 그게 너한테도 좋을까?"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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