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온통 노랑이야!” 경멸할 땐 언제고…208만배 몸값 ‘들썩’ [0.1초 그 사이]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탕.’
자기 앞의 생에 절망해 낡은 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쏜 화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작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그는, 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입니다. 고흐는 빗맞은 총알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고, 사흘 뒤에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에 불과했죠. (그의 죽음이 타살로 추정된다는 일부 주장도 있습니다.)
운명을 달리한 고흐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작은 무리가 모였습니다. 마지막 숨과 사투를 벌인 그의 비좁은 두 평 남짓한 방에 말이죠. 그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을 한 점 한 점 벽에 걸었는데요. 그런데 유독 눈에 띈 작품이 있었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 찬란한 빛을 내는 그림. 화폭의 주인공은 살아생전 고흐가 그토록 사랑한 꽃이자, 짧은 생에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꽃. 바로 해바라기였습니다.
자해, 정서적 불안, 불화, 고독, 자살. 고흐의 쓰리고 고통스러운 삶은 한평생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로서 그의 인생에 극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가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지만은 않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가 그 증거입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 진솔했거든요. 이런 점에서 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인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1888)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내 그림은 고뇌 가득한 절규이기도 하지만 소박한 해바라기에 대한 감사를 상징하기도 해.” (고흐가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1890년 2월 19일)
미술사에서 자기 파괴의 전무후무한 아이콘인 고흐가 울부짖었던 나날들. 해바라기는 바로 그 사이에서 피어난 순간적인 황홀함만을 상징하진 않습니다. 해바라기를 표현한 섬세한 색감, 해바라기가 가진 찰나의 모습, 그리고 고흐가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어쩌면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그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이자, 스스로를 구원하게 된 기회에 대한 감격이었을지도 모르겠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는 고흐 사후에 이르게 판매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그림이 고흐라는 화가를 오롯이 설명하는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 지금부터 그가 그린 해바라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고흐가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서 혼자 생활하기 시작한 나이는 불과 열여섯. 그러나 그는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도, 원만한 교우 관계도 맺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10대부터 고흐의 삶은 외롭고 평탄하지 않은 일상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그런 그는 프랑스 파리에 기반을 둔 화랑의 지사에서 사무원으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이 화랑은 그의 큰아버지가 운영하던 곳이었죠. 그러나 고흐는 상사와의 불화로 끝내 여기서조차 해고당하게 됩니다. 그 뒤로 고흐는 목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자 했고, 벨기에에 있는 악명 높은 광산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설교를 하고자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화가가 돼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어.” 고흐가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던 동생 테오에게 전한 소식은 이렇게나 뜬금없습니다. 당시 고흐의 나이는 스물여섯. 우연히 렘브란트의 성화를 본 그는 화가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건데요. 그가 자신의 새로운 꿈을 강렬한 종교적 소명처럼 받아들였던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규 미술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고흐가 한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그는 동생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물감과 화구를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5년 만에 그린 그림이 ‘감자 먹는 사람들’(1885) 입니다. 잠시 그림을 볼까요. 피로에 지친 몸으로 초라한 등불 아래 모인 어느 가족. 이들은 고된 노동 끝에 수확한 감자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접시로 내민 손을 보면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죠. 고흐가 생각한 진정한 의미의 거친 농부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러한 그들의 삶이 신성한 복음과 같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고흐는 동생이 살고 있는 몽마르트르의 한 아파트에 묵으면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이곳은 젊은 예술가들이 몰리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었을 때였거든요. 고흐가 색채에 완전히 매료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그는 회색과 갈색조의 팔레트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천성이 ‘노력형’인 고흐는 주로 파란색 바탕과 강한 대조를 이루는 노란 해바라기를 짧은 붓놀림으로 묘사했습니다. 보색이 되는 두 색을 한 화면에 쓰지 않는 일종의 관행을 깨기 시작한 겁니다.
“나는 온전히 꽃 그리기와 관련된 색채에 대해 연구했어.” 서른셋의 고흐가 친구인 영국 화가 호러스 리벤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요. 자유로워진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진 않나요. 그렇게 고흐는 눈을 열고 실재하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며 감동을 주는 것들을 그려나갔습니다. 그 중 하나가 꽃이었고,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해바라기였던 겁니다.
특히 8월 중순 정도에 만개하는 해바라기는 대표적인 여름 꽃입니다. 태양을 바라보고 자란다고 해서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신성한 꽃으로도 여겨지는데요. 특히 기독교에서는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를 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해바라기의 특징이 구원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고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만 같은데요.
다만 고흐가 해바라기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그가 꽃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꽃이 보여주는 시각적인 효과에 골몰한 점이 더 눈에 띕니다. 경이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노란색을 자신만의 시각적인 리듬으로 표현한 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인데요.
실제로 고흐는 동네 카페에서 연 비공식 전시회에 해바라기 두 송이를 그린 그림을 전시했는데요. 이는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에서 장기 체류를 마치고 돌아온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의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기에도 충분했습니다. 고갱은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두 점을 자신이 그린 카리브해 풍경화와 교환하자고 했고, 고흐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고흐를 ‘해바라기 화가’로 처음으로 지칭해준 이가 바로 고갱이었습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고흐에게 이는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추후 고흐의 삶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게 하거든요.
고갱이 파리를 떠나고 1년 뒤에 고흐도 프랑스 남쪽 끝에 있는 아를로 향했습니다. 고흐의 대표작 ‘노란집’(1888), ‘밤의 카페 테라스’(1888), ‘별이 빛나는 밤’(1888)이 쏟아져 나온 바로 그곳, 아를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자유롭게 색채를 써서 내 개성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어.” 아를에서 고흐는 영롱한 햇살이 쏟아져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눈앞의 풍경을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매번 화폭과 그림 도구를 챙겨 햇살이 찬란한 자연으로 향했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고독한 나날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점차 충만해졌습니다. 그는 닷새 동안 해변에서 한 그림만을 처절하게 그릴 정도로 집요하게 작업에 몰두했을 정도였는데요.
그런 고흐가 가장 애타게 기다린 사람이 바로 고갱이었습니다. 고흐의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시대의 라이벌, 연인, 혹은 소울 메이트로 연결되는 고갱. 태양이 작열하듯 노랗게 이글거리는 고흐의 해바라기는 그림은 바로 고갱 때문에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를로 오겠다’는 고갱의 편지를 받고 고흐는 매일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해바라기 그리기에 오롯이 전념하거든요. 고흐는 고갱이 머물게 될 방에 해바라기 그림을 걸어주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꽃이 빨리 시들기 때문에 고흐는 모든 그림 작업을 한번에 끝내고자 했습니다. 그 압박감에 짓눌리면서도 그는 여러 점의 해바라기를 한꺼번에 그려냈죠. 그렇게 마지막에 그린 해바라기 작품이 바로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입니다.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작품이 최고가 될 것”이라고 적혀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림을 잠시 감상 볼까요. 우선 화폭 여기저기에 칠해진 노란색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 같은 노란색이 아닙니다. 미세하게 다른 갖가지 노란색을 사용해 마치 빛을 받아 타오르는 해바라기의 모습인 것만 같습니다. 단순한 기교로 그려진 것만 같은데 반짝이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묻어납니다.
“저 금색과 꽃의 색채를 녹여내려면, 한 사람의 온전한 에너지와 관심이 있어야 해.” 그가 한 말을 반추해 보면, 어떤 의미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는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 그 자체를 머금고 있기도 하고요. 고갱을 향한 고흐의 격정적인 애정이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고흐와 고갱, 두 사람이 만약 만나지 않았다면, 미술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래서 해바라기는 어쩌면, 고흐의 예술세계를 여는 열쇠가 아닐까 싶은 대목인데요. (그렇게 고흐는 1888년 8월, 4점의 해바라기 그림 초판을, 이어 1889년 1월 3점의 해바라기 그림 재판을 그렸습니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해바라기 작품이 가진 명성을 고흐는 결코 예측하지 못했을 겁니다. 많은 화가들의 어떤 해바라기도 고흐의 것처럼 강렬하진 못했거든요. 맨 처음 12파운드(약 1만8000원)에 팔린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재판은 1987년 경매에서 2500만파운드(약 381억원)에 낙찰됩니다. 가격이 무려 208만배나 뛴 겁니다. 당시 그림을 구매해 소장한 곳이 일본 도쿄 야스다 박물관(현 손보재팬 미술관)입니다.
다만 고흐의 기대와 달리, 둘의 끈끈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갱은 아를에 머무는 동안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과 완전히 다른 고흐가 못마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기랄, 온통 노랑이야!” 고갱은 고흐의 모든 것을 경멸했고 그렇게 끝내 고흐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이에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내기에 이르고요.
그런데 말년을 타히티에서 보낸 고갱의 가슴 속에는 막연한 그리움이 가득했던 것만 같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흐를 진심으로 추억하거든요. 그것도 자신의 오두막 앞에, 그 싫다던 노란색 해바라기를 직접 하나하나 심으면서 말이죠. 고흐가 남긴 해바라기는 정녕 무엇이 되어, 지금 이 시대와 다시 만나, 이렇게 독자 여러분들까지 긴 글을 읽게 만든 걸까요.
“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람들도 내 그림이 거기에 사용한 물감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그 대답이 대신 적혀 있는 것만 같습니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만개하는 늦여름, 저마다 마음 속 자신만의 해바라기를 떠올려보며 남은 주말 편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요즘 전시] 소식도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폴 고갱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의 작품세계를 비롯해 비싸게 거래된 고갱의 그림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참고자료〉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조아라 옮김, 마로니에북스
고흐와 고갱, 김광우 지음, 미술문화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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