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한반도를 휩쓴 ‘일본 가요’는? [역사의 뒤 페이지]
1945년 8월15일, 일본제국이 패망했다. 조선총독부도 사라졌다. 수십 년 스며들었던 권력이 과연 하루아침에 사라졌을까? 천만에. 조선총독과 충성스러운 부하 일부가 은밀히 한반도에 남아 조선총독부 지하부를 결성했다. 그렇게 은인자중 권토중래한 지 20여 년 만에 마침내 총독이 라디오방송으로 돌아왔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며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제국의 불행한 패전이 있은 지 20여 년. 그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정세도 크게 바뀌었거니와 … (패전 당시) 본인은 뜻을 같이하는 부하들과 민간인 결사대를 거느리고 이 땅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반도의 영유는 제국의 비밀이었습니다. 영혼의 꿈이었습니다. 오늘날 제국은 이 비밀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어진 두 번째 방송에서 총독은 4·19 직후의 일본 문화 열기에 대해 언급한다. 총독의 목소리는 흥분에 젖어 있다. “(4·19 직후에) 문학과 아울러 대중가요에 있어서의 일본풍의 휩씀은 눈부신 바 있습니다. …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일본풍의 선율과 음계에 익숙해짐으로써 가장 근본적인 뜻에서 정서적으로 내지와의 유대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일입니다. 음악이란 장르는 번역 불가능한 것으로 문학의 경우처럼 본질과 풍속의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도인의 정서가 일본 선율이라는 벡터로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제국의 문화 정책의 일대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 흡족한 마음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실제 상황이 아니니 놀라지 말자. 최인훈(1936~2018)의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1967)에 나오는 내용이다. 해방 후에도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은밀히 유지되었다는 상상 아래 총독의 육성을 빌려 당대 한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4·19 혁명 직후의 일본 대중가요 붐도 고발 대상 중 하나다. 해방 후 20년이 지나도 정서적인 독립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4·19 직후에 일본 대중가요 붐이 일었다고? 그렇다. 그것도 상당히 뜨겁게. 혁명 직후인 5월 초의 신문 기사를 보자.
“시내 명동의 R 다방에서는 5월 들어서면서부터 일본 여자가 부르는 음란한 노래가 하루 종일 전축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R 다방뿐만 아니라 요즈음 갑자기 다방마다 일본 가요는 무슨 때라도 만난 듯이 범람하고 있다. 재빠른 업자는 벌써 일본 영화 수입에 착수하였다고… 서울에서, 부산 거리에서, 그리고 고급 요정에서 일본 가무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키 작고 털 많은 일본인과 꾸벅꾸벅 머리를 맞부딪쳐가며 재회를 반가워하는 ‘일본 말 인사’가 오고 가고, 은밀한 거래가 시작되는 광경이 아아, 그런 광경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오죽 좋으련만…(〈동아일보〉 1960년 5월7일, ‘제2공화국에의 고동(3)’).”
이승만 정부 정당성의 기초는 반공과 반일이었다. 정부와 민간 모두에서 강력한 왜색 일소 운동이 실행됐다. 일본어와 일본식 지명, 일본 노래와 일본 서적 등 일본 문화 전반이 금지됐다. 민간 교류도 금지됐다. 심지어 일본 팀을 한국 땅에 들일 수 없다며 월드컵 축구 예선전을 두 번 다 어웨이 경기로 치를 정도였다. 1950년대의 4차에 걸친 국교 정상화 회담도 모두 공전했다. 미국의 압력에도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자유의 공간이 열리자 느닷없이 일본 대중가요 붐이 터져 나온 것이다.
자장가로 일본 군가 부르던 세대
붐이 어느 정도였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꽤 뜨거웠던 건 분명하다. 이승만의 경호실장 격인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는 4·19 때 발포 명령을 내려 체포됐다. 그가 부정축재로 소유한 무교동 Y 빌딩의 Y 다방에서는 하루 종일 일본 가요만 틀어대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한국 가요 음반을 제작하던 7대 레코드 제작회사도 마비 상태에 빠졌다. 전국 군소 레코드 회사 10여 곳에서 일본 음반을 대량으로 불법 복제하여 싼값에 푼 탓이다. 저작권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때이니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현제명과 함께 한국 음악계를 이끌던 서울대 음대 학장 김성태는 이렇게 한탄했다. “혁명은 마치 왜색 가요를 불러들이기 위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혁명이 난 것 같다는 주장은 물론 과장법일 터이다. 하지만 저 열풍의 밑바닥에 ‘총독’의 표현대로 과연 ‘내지와의 정서적 유대’가 없었을까? 〈총독의 소리〉의 작품 해설에서 국문학자 김윤식은 일본 군가를 자장가 삼아 부르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앞에서 나는 우리 세대가 일본 군가라든가 일본식 국민가요의 습득에서 비롯되었다고 적고, 이것이 우리 세대의 시작이라 불렀거니와, 바로 이 일본식 교육의 뿌리야말로 우리 세대의 원점 회귀 단위의 일종이 아닐 수 없다.”
일본어가 모국어나 다름없는 기성세대에게는 과연 일본 노래 열풍은 원점 회귀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청년세대도 일본 대중문화에 열광했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화연구자인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한다. 식민지를 거의 경험하지 않은 자유의 전위부대들이 일본 문화에 열광했다면 식민지성의 잔재라고만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세련된 감성과 감각이라는 ‘트렌드’에 대한 청년세대의 갈망이 일본 문화를 경유하여 폭발한 것이라고 보는 쪽이 맞다는 것이다(권보드래·천정환, 〈1960년을 묻다〉, 천년의상상).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좀 더 냉정한 질문도 던질 수 있다. 과연 4·19 이후의 일본 대중가요 붐이 그렇게 급작스럽고 기이한 현상이었나 하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기에 일본과 관련된 모든 게 금지됐지만, 역으로 보자면 그 정도로 일본 대중문화가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당연한 게 아닐까? 노래와 언어 관습이, 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다. 해방이 되고 총독부가 사라진다고 감수성마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총독부는 지하에 숨은 것이 아니라 감수성의 총독부로서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요란한 왜색 일소의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기 내내 일본 대중가요는 도처에서 울려 퍼졌다. 흘러간 옛노래가 아니라 당대의 히트곡이 해협을 건너와 불리고 있었다. 전쟁 중의 임시수도 부산에서도 일본 가요는 인기였다. “부산의 거리에서는 밤 9시만 경과하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적지 않은 다방에서 일본 가요를 공공연하게 들려주고 있는 기막힌 현실”이었다.
어떤 노래들이 인기를 끌었을까? 신문 기사는 ‘동꼬동꼬’ ‘미즈이로노 왈츠’ ‘이별의 플랫폼’ 등을 꼽고 있다. 원제목이 ‘동꼬부시(トンコ節)‘인 동꼬동꼬는 1949년에 발표됐고 1951년에 다시 히트한 노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자랐고 ‘엔카의 아버지’로 불린 고가 마사오(1904~1978)의 작품이었다. 1950년에 발표된 ‘미즈이로노 왈츠(水色のワルツ)’는 1950년대에 최고 인기를 누린 여성 가수 후타바 아키코의 대표곡이었다. ‘이별의 플랫폼’이라는 제목의 일본 가요는 찾을 수 없다. 단서를 통해 추적해보니 역시 후타바 아키코가 1947년에 발표한 ‘밤의 플랫폼(夜のプラットホーム)’이었을 것 같다. 작곡가인 핫토리 료이치는 일본 재즈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목포의 눈물’의 작곡가 손목인이 1939년 일본에서 ‘싱 싱 싱’을 녹음할 때 편곡을 맡기도 했다.
당대 일본 대중가요의 유행을 파악하고 음반을 들여와서 즐길 수 있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당연히 경제력도 있고 정보력도 있는 ‘사회 지도층’이었다. 1950년대 신문들은 이 지도층의 일탈을 수시로 고발하고 있다. 1954년 원주에서는 “모 헌병대장이 일본 노래를 부르면서 떠드는 것을 순찰 순경이 취체(取締)하려다가 언쟁”이 일어나 결국 애꿎은 요릿집만 영업정지를 당했다. 같은 해 광주에서는 미납 세금 징수차 출장을 나온 세무관리 여러 명이 요리조합 이사들과 함께 여급을 불러 춤을 추고 일본 노래를 부르다가 지탄받고 있다. “도처의 요릿집에서 ‘동꼬동꼬’로 행인들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대개 지식층 인사인 이들은 “‘동꼬동꼬’라야만 술맛이 나며 일본 노래라야만 술을 마실 수 있”다고 하니 개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동아일보〉 1956년 2월3일, ‘요정의 일본 노래, 소화통도 건재’).
1955년 6월에는 왜색을 일소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며 일곱 개 정부 부처가 합동회의를 열었다. 내핍 생활을 할 것, 양담배를 피우지 말 것, 요정에 다니지 말 것, 일본말을 쓰지 말 것, 밀수품을 들여오지 말 것 등을 결의하고 지시를 내렸다. 〈경향신문〉의 ‘여적’ 칼럼은 “농민이나 세민들이 실천할 해당 조항은 하나도 없다”라며 비판했다(〈경향신문〉 1955년 6월30일). 당신들이나 잘 지키라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일어날수록 이승만의 (대외적) 반일 의지는 활활 타올랐고 반일의 수사는 종종 선을 넘었다. 이승만의 반일 노선이 왜 그리 강경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국내 정치의 관점에서 친일파와 타협한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국제관계에 초점을 두고 미국의 일본 중시 정책에 맞서기 위해서였다는 해석도 있다.
대중가요의 속살에 속속들이 스며든 일본풍을 청산하려면 비상한 노력이 필요했다. 1949년, 공보처는 우익 대중음악인의 동참 아래 이른바 국민가요운동,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했다. 퇴폐적인 왜색 가요곡을 정화하고 건전한 가요곡을 제정, 보급한다는 취지의 운동이었다. 서일수 작사, 황문평 작곡의 ‘꽃 중의 꽃(1956)’ 같은 노래가 이 운동으로 나온 대표적인 곡이다. “꽃 중의 꽃 무궁화 꽃/ 삼천만의 가슴에/ 피었네 피었네 영원히 피었네” 같은 가사를 접하면 과연 국민의 가요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어떤 ‘반일’인지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권력이 주도하고 대중음악인이 화답하여 국민운동의 틀로 국민 모두가 부르는 건전가요를 보급한다는 시도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취지와 형식 모두에서 일제 말 총력전 시기의 국민개창운동의 반복이었다. 심지어 명칭마저 똑같았다. 왜색 가요를 부르기 위해 혁명이 난 것 같다며 개탄하던 김성태는 바로 저 총력전 시기에 친일 협력 음악단체인 조선음악협회 작곡부 위원으로서,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일원으로서, 국민개창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국민가창지도대의 일원으로서 곳곳을 누비며 전쟁을 찬미한 바 있다. 이런 이들이 여럿이었다.
비슷한 사례가 넘친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창설한 애국반은 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주민을 감시·통제·동원하는 조직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1948년에 국민반으로 부활하고, 1957년부터 대대적으로 강화됐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의 반상회까지 이어졌다. 1952년에는 ‘우리의 맹세’를 만들어 교과서를 포함한 모든 책의 뒷면에 인쇄하게 하고, 국민에게 암기를 강요했다. ‘황국신민서사’와 같이 3항목으로 구성됐고, 심지어 책 뒷면의 인쇄하는 자리까지 같았다. 일제시대에는 천황의 생일이 천장절이라고 불리는 국경일이었다. 이승만의 생일도 임시공휴일로 지정되고 전국에서 시가행진과 축하 비행, 매스게임과 마라톤, 글짓기, 합창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대부분은 주요 열강에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편지마다 꼭 자신을 프린스라고 일컬었다. 전주 이씨 왕족 출신이라는 걸 저렇게 알리고 싶어 했다. 그가 되고 싶었던 건 대통령이라는 이름의 왕이 아니었을까?
의도야 무엇이든 이승만과 그의 권부가 표면적으로 반일에 열심이었다는 걸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고 싶었던 나라, 살고 싶었던 세상이 어떤 곳이었는지 묻는 게 더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그 나라는 조선총독부를 많이 닮았다. 일본을 반대한다는 반일에서 나아가 더 보편적인 탈식민의 과제로, 민주주의 지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반일이 절대 가치가 아니라 어떤 반일이냐가 중요했다는 말이다. 지금도 이 말은 유효하다.
※이번 호로 ‘조형근의 역사의 뒤 페이지’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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