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번 고민했지만 연봉 3배란 말에”…中기업 가는 한국 인재 누가 욕하랴 [방영덕의 디테일]

방영덕 매경닷컴 기자(byd@mk.co.kr) 2024. 8. 2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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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삼성전자]
“심리장벽이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없어졌단 의미의 이 말에 한숨을 내쉬는 직원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대기업 반도체 부문 종사자입니다.

미국과 달리 중국 기업으로 이직할 때는 일종의 심리장벽이 있었는데, 그런 것마저 사라지는 업계 분위기를 전하면서였죠.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국내 핵심산업에서 인재 유출에 대한 우려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만성적인 인력난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고급인력 유출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에 의대 증원에 따른 인재 이탈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그러고보니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의대 입시를 준비 중인 N수생과 직장인들 사연을 모집하고 있네요).

특히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은 커져갑니다. 최첨단 기술이 집적된 분야인 만큼 고급 인력 확보는 필수입니다. 고급 인력 확보는 곧 회사의 경쟁력과 이익으로 연결됩니다만, 단기간 내 인재를 확보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지난해 2월 28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반도체 특성화대학 지원사업’ 공청회에서 참석자가 안내 책자를 보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오는 2031년 국내 반도체 인력 규모는 30만4000명으로 증가합니다. 그러나 현재 반도체 관련 인력 규모는 약 18만명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매년 대학이나 대학원 등에서 배출되는 반도체 산업 인력은 5000명 이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2031년에는 무려 5만4000명의 반도체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옵니다.

“AI(인공지능) 반도체 선구자로서 SK하이닉스가 리딩해가는 것은 구성원이 모두 원팀으로 일한 덕분입니다.”

지난 20일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AI반도체 시장에서의 좋은 실적을 달성한 공을 구성원들에게 모두 돌렸습니다. 그만큼 반도체 인재의 중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던 말이었죠.

하지만 말 만으로 막을 수 없는 게 ‘K반도체’ 인재 유출의 현주소입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K반도체 인재들이 외국 기업으로 이직하는 가장 큰 이유에는 높은 연봉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보다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에서 일할 때 1.5~3배 가량 더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 기업에서 현재 연봉의 최대 4배를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중국 반도체 산업을 통제하며 장비와 기술 확보가 어려워지자 한국 반도체 기업의 기술 인재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 이탈이 곧 기술 유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재 유출에 따른 기술 유출 역시 더 과감해지고,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문제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을 시도하다 적발된 23건 중 65%인 15건이 반도체 분야에서 발생했습니다.

실제로 SK하이닉스에서 과거 근무했던 중국 국적의 직원은 반도체 불량률을 낮추는 핵심 기술을 중국 화웨이로 빼돌린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 직원은 화웨이 이직이 결정된 2022년 퇴사 직전 ‘핵심 반도체 기술 구현을 위한 공정 문제 해결책’을 담은 A4 용지 3000장 분량의 내부 자료를 출력해 중국으로 넘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삼성전자 전 임원은 핵심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 설계도면을 빼돌려 중국에 ‘복제공장’ 설립을 시도하다 적발돼 업계 충격을 주었습니다.

재택근무를 하며 외국 경쟁사 이직을 준비하던 삼성전자 엔지니어는 국가 핵심기술이 포함된 중요 자료를 모니터 화면에 띄운 뒤 다수의 사진을 촬영·보관하다 발각됐지요.

[사진출처 = 연합뉴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국내 디스플레이 기업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중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이 약진하는 상황에서 날로 대범해지는 핵심 기술 유출로 국내 영업비밀 침해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산업기술보호법과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LG디스플레이 전직 팀장급 직원 A씨 등 2명은 구속기소되고 1명은 불구속 기소됐습니다.

검찰에 따르면 A씨 등은 2021~2022년께 LG디스플레이 중국 광저우 공장의 설계 도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중국 경쟁업체에 넘긴 혐의를 받고 있는데요.

특히 A씨는 2021년께 중국의 대형 디스플레이 업체로 이직하면서 범행을 시작, 이직 후에는 당시 LG디스플레이에서 근무하던 직원 등과 공모해 대형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양산 기술을 빼돌린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 동안 줄곧 글로벌 OLED 시장에서 1위 자리를 지켜왔던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한국 기업의 합산 점유율(출하량 기준, 49%)은 올해 1분기 처음으로 2위로 떨어졌습니다.

지난해 1분기만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 기업의 점유율은 각각 62.3%와 36.6%로 큰 격차를 유지했으나 불과 1년만에 중국 기업들(49.7%)에 추월 당한 것입니다. 잇따른 인재 유출과 기술 유출 그리고 기술 추격과 시장 역전까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 = 대통령실]
그 동안 국내 대법원이 기술 유출 범죄에 내린 최대 형량은 5년이 고작이었습니다. 대부분 기술 유출 사건은 집행유예나 1~2년 실형에 그쳤던 게 사실입니다.

그나마 대법원 양형 기준 개정으로 지난 7월부터 산업기술 해외 유출에 대해선 최대 형량이 9년에서 12년으로 높아졌고요. 초범이라도 실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관련 조항을 강화했습니다.

8월 들어서는 이른바 ‘기술탈취 3종 세트’로 불리는 특허권 침해, 영업비밀 침해, 아이디어 탈취는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배상해야 합니다.

특허법·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에 따라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가 기존 3배에서 5배로 확대된 것인데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 국내 주력 산업의 기술 유출 문제는 기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직 직원들의 기술 유출로 피해를 본 기업들에게 왜 철통 보안과 직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냐는 식의 비판보다는 국가 기술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로 접근해 해결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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