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중앙선 침범해도 산재”…잇단 근로자 보호 판결 [허란의 판례 읽기]
출퇴근 산재 신청 급증세
[법알못 판례 읽기]
법원이 출퇴근 중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 산업재해를 폭넓게 인정하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최근에는 출근길 중앙선을 침범해 사망한 근로자의 사고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주목받았다. 이는 ‘출퇴근 재해 산재보상제도’ 도입 이후 근로자 보호를 강화하는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으로 시행된 출퇴근 산재는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뿐만 아니라 도보나 자차, 지하철·버스 등으로 출퇴근하다가 다친 경우도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더 나아가 출퇴근 중 장보기, 자녀 등하교 돕기, 병원 진료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행위를 하다가 다쳐도 폭넓게 산재로 인정된다.
중앙선 침범 사망사고도 산재 인정
올해 6월 서울행정법원 제13부는 출근 중 중앙선을 침범해 덤프트럭과 충돌해 사망한 근로자 A 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2023구합86478).
A 씨는 2021년 7월 자가용으로 출근하던 중 황색 실선의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로의 덤프트럭과 정면충돌했다. 근로복지공단은 당초 “근로자의 단독 과실 및 중앙선 침범이 사고의 직접 원인”이라며 유족급여와 장례비 지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망인의 사망이 범죄행위가 직접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어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고 이는 오히려 망인의 출근을 위한 운전 과정에서 통상 수반되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원고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또한 “사고 발생 도로가 중앙분리대 없이 우측으로 굽어 있어 반대차선 차량이 잘 보이지 않았고 겨울철 이른 아침이라 주변이 어두웠다”며 “단순 부주의나 실수로 인한 순간적 중앙선 침범”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단순히 중앙선 침범 사고라는 이유만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정한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아니하는 예외 사유인 범죄행위와 동일하게 취급하기 어렵다”며 해당 사고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의 판례를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중앙선 침범으로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사고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졸음운전 후 뇌출혈도 출퇴근 재해 인정
같은 법원 행정11단독 김주완 판사는 7월엔 출근길 졸음운전 사고로 뇌출혈이 발생한 근로자에 대해서도 산재를 인정했다.
72세 청소노동자 B 씨는 2019년 새벽 출근 중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해 역주행하다 전신주와 충돌했다. 사고 직후 ‘대뇌출혈, 기저핵의 뇌내출혈’ 진단을 받았다.
B 씨는 이 사고로 인한 뇌출혈이 업무상 질병 또는 출퇴근 재해에 해당한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으나 공단은 B 씨의 과거 고혈압·심장질환 치료 이력 등을 들어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신청을 기각했다.
법원은 “사고로 인한 심리적 충격이 혈압 상승을 일으켜 뇌출혈 발병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B 씨에게 고혈압 등 기저질환이 있었음에도 “사고가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고 봤다.
이어 “B 씨가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으로 출근을 하던 중 발생한 사고로 뇌출혈이 발병했기 때문에 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정한 ‘출퇴근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두 판결 모두 사고 발생 당시의 도로 상황, 시간대, 날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엇갈리는 역주행 사고 판결
그동안 역주행 사고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엇갈렸다. 근로자의 운전 과정이 일반적인 출퇴근 경로인지, 사고 자체가 업무에 내재한 위험인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산재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2020년 1월 서울행정법원은 사적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친구 집에서 출근하다 역주행 사고를 내 사망한 근로자의 경우 산재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자의적, 사적으로 한 음주 상태에서 출근하다 사고가 발생했으므로 순리적 경로로 출근 중에 발생한 것으로 평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2021년 4월 같은 법원은 교육을 듣고 복귀하던 중 역주행 사고로 사망한 근로자의 경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오로지 근로자가 형사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법 위반행위를 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고 위반행위와 업무 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판결들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2항의 해석에 근거한다. 해당 조항은 “근로자의 고의·자해행위나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판례들은 “근로자의 업무수행을 위한 운전 과정에서 통상 수반되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이라면 사고가 중앙선 침범으로 일어났다는 사정만으로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노무 전문가는 “과거 10대 중과실 사유가 있으면 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최근엔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추세”라며 “유사 사건 발생 시 충분한 사실 조사와 증거 수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돋보기]
출퇴근 산재 신청 ‘역대 최고’
2018년 시행 이후 출퇴근 산재 신청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출퇴근 재해에 대한 산재보험 신청은 2023년 1만1752건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1만 건을 넘어섰다. 2020년 7732건에서 3년 새 34% 증가한 수치다. 올해도 5월 기준 5955건을 기록하면서 최고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근 서울 시청역 인근에서 역주행 차량이 직장인들을 덮쳐 9명이 숨진 사건과 같이 교통사고에 의한 출퇴근 재해는 지난해 3254건으로 전체의 27.7% 수준이었다. 이는 역대 최고치다.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까다로운 업무상 질병과 달리 사고 산재의 경우 사실관계가 비교적 명확해 출퇴근 산재 승인율도 매년 9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출퇴근 산재 신청이 늘어난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출퇴근 시간대 교통사고가 소폭 증가했다. 도로교통공단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대비 2023년 출퇴근 시간대 교통사고 발생 건수는 2% 증가했고 부상자는 2.4% 늘었다.
또한 출퇴근 중에 당한 재해도 ‘산재’라는 인식이 과거보다 커졌다. 제도 도입 초기와 달리 최근에는 꾸준한 홍보와 인정 범위 확대 등으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출퇴근 산재는 개별 사업장의 산재보험료율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산업재해조사표 제출 의무도 없어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다치고선 ‘출퇴근 사고’라고 거짓 신고하는 부정수급 사례도 적지 않아 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최근 판결들과 제도 변화로 인해 출퇴근 재해 인정 범위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근로자들의 권리는 강화되지만 기업의 산재보험료 부담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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