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 상태 발견된 '효녀' 간호사…"형이 죽였다" 진술, 수사 좁히자 번복
일주일 후 집 근처서 발견…'전과 10범' 유력 용의자 범행 부인
(서울=뉴스1) 김학진 기자 = "죽은 사람이 떠내려가요"
이른 태풍이 몰고 온 비바람이 잠시 주춤하던 2000년 8월25일. 나주시 만봉천에서 떠내려가고 있는 한 여성의 시신을 본 아이는 다급히 집으로 뛰어가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렸다.
현장에서 발견된 사체는 심하게 부패한 상태로 퉁퉁 불어 성별 분간만 가능할 정도였다.
DNA 대조 결과 얼마 전 실종 신고가 접수된 간호사 A 씨(21)의 사체임이 밝혀졌다. 당시 사인을 익사라고 경찰은 판단했지만, A 씨의 옷가지가 전부 벗겨져 있는 등 의심되는 정황이 많았고, 가족들과 지인들은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 '효녀' 간호사 딸 술에 취한 아버지와 집 나선 뒤 실종
변을 당한 A 씨는 광주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나주의 한 종합병원 정형외과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였다.
병원 옆에서 혼자 자취 생활을 했지만,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집으로 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성실하고 속 깊은 딸이었다.
2000년 8월 18일엔 야간근무를 마치고 낮 12시 넘어 집에 와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함께 저녁 식사 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저녁 만취한 채로 돌아온 아버지는 다짜고짜 아내에게 큰소리를 쳤다. 이 모습을 본 A 씨는 아버지를 데리고 나와 "아빠,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세요. 제가 더 잘할게요"라고 설득했다.
진정된 아버지가 집 앞 정자에 누워 잠이 들자 A 씨는 근처 만봉천을 지나 집으로 걸어갔다. 이것이 A 양의 생전 목격된 마지막 모습이었다.
잠이 든 아버지는 한 시간 후 정자에서 깨어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먼저 와있을 줄 알았던 딸은 집에 없었다. 걱정은 됐지만 자취방으로 딸이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딸이 병원에 출근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한 A 씨의 부모는 부랴부랴 자취방까지 찾아갔지만 딸은 그곳에 없었다. 끝까지 연락이 닿지 않자 근처 파출소에 가출 신고를 한 뒤 딸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 일주일 만에 시신으로…첫 번째 용의자는 아버지
A 씨는 일주일 후 부녀가 헤어진 장소로부터 3.2㎞ 떨어진 세지면 오봉리 청용교 다리 밑에서 발견됐다. 25일 마을의 초등학생이 개천 풀더미에 걸려 있는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 전화를 했다.
한여름의 날씨 탓에 A 씨의 시신은 외상 흔적을 찾거나 독극물도 검출 해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30일까지 경찰은 만봉천 일대를 수색했지만 입고 나간 옷, 끼고 있던 반지 등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결국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후 경찰은 A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가족과 친구, 직장동료 등 주변인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고, 그럴 만한 정황 또한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목숨을 끊으려는 여성이 스스로 옷을 다 벗은 채로 물에 뛰어들지는 않는다는 상식에 부딪혔다.
혹시 물살에 옷이 벗겨나갈 수 있지 않겠나, 경찰은 생각했지만, 사망 추정일 당시 하천은 수심이 얕았고, 추후 유속에 옷이 벗겨졌다고 하더라도 브래지어는 물론 끼고 있던 반지까지 빠져서 떠내려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조사를 할수록 타살의 확률이 커졌다.
경찰은 마지막까지 A 씨와 함께 있었던 아버지를 첫 번째로 용의선상에 올렸고, 아버지를 심문했으나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지인이 사람을 죽였다"…수상한 제보 전화
시신이 발견된 지 약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수사는 답보 상태였다. 그러던 9월 16일 오후 2시. 경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는 "지인이 사람을 죽였다. 영산포에 사는 남자 친구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는데, 살인한 지인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내게 그 말을 한 뒤 지금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덜덜 떨며 불안해하고 있다. 아랫마을에 사는 아가씨를 목 졸라 죽였다고 했다더라"고 말하고는 신원을 밝히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찰은 즉각 발신지 추적에 나섰고, 제보자가 광주에 사는 여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경찰은 즉각 여성의 남자 친구 C 씨(27)를 소환해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에서 C 씨가 밝힌 내용은 제보자의 내용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C 씨는 "고종사촌 B 씨(35)가 간호사를 죽였다고 말했다. 사촌 형은 피해 여성의 집에서 3㎞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다. B 씨가 트럭을 운전하며 만봉천 옆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평소 안면이 있던 A 씨가 혼자 걸어가는 것을 보고 목을 졸라 죽였다고 했다. 그 후 옷을 벗긴 뒤 개천 풀숲에 밀어 넣고, 신발과 옷은 형 집 앞 냇가 돌 밑에 숨겨놨다고 했다"고 밝히며 B 씨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드는데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자신을 찾았다고 진술했다.
C 씨가 경찰에 밝힌 내용은 실제 사건의 상황과 거의 일치했다. 범인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한 경찰은 즉각 B 씨를 찾았지만 동생이 경찰서에 불려 갔다는 말을 듣고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 유력한 용의자 B 씨…거짓말 탐지기 모두 '거짓'
경찰은 종적을 감춘 B 씨를 6개월간 추적 끝에 전라도 한 모텔에서 붙잡았다. 체포 당시 그는 이미 상해, 폭력 등 전과 10범의 전과자였다.
하지만 체포된 B 씨는 사촌 동생이 털어놓은 진술에 대해 모두 부인하며 "동생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교통사고를 내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거짓말했을 뿐이다. 왜 동생이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발뺌했다.
하지만 경찰은 동생의 진술이 상당이 구체적이었고 대부분이 일치했기 때문에 B 씨가 용의자라는 확신을 거둘 수 없었다.
경찰은 진실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실시했다. "당신은 예원 양을 죽였습니까?", "아니요" 결과는 '거짓'이었다. 거의 모든 탐지기 반응에서 '거짓'이 나왔다. 하지만 거짓말탐지기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어서 수사엔 큰 진전이 없었다.
또 B 씨의 진술과 알리바이는 일관성이 없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범행을 부인했다. 범인이라는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전혀 없었던 경찰은 일단 B 씨를 풀어주고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 확보에 나섰다.
◇ 결정적 진술 뒤집혀…미제사건 분류 사건 종결
"사촌 형 B 씨가 그저 저를 겁주려고 그랬던 거다" 용의자의 살인 행각을 진술했던 C 씨마저 말을 바꿨다.
명백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 결정적인 진술 마저 뒤집혀버렸다.
더 큰 미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계속된 수사에도 더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경찰은 결정적 증거 부족으로 B 씨의 기소에 실패했다.
결국 이 사건은 '나주간호사살해사건'이라는 사건명을 붙여 미제사건으로 분류하며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러는 동안 B 씨는 광주에서 결혼해 가정까지 꾸렸지만, 8건의 범죄를 또 저지르며 수차례 징역을 더 살았다.
미제사건 수사팀은 여전히 사촌 형 B 씨를 주시하고 있다.
khj80@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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