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고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싯다르타>(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민음사)
<싯다르타>는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유희> 등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유복한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싯다르타가 집을 떠나 삶의 비의를 깨닫는 과정을 그렸다. 일종의 성장소설(Bildungsroman)인데,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성장하는 내용이기에 성장소설의 전형으로 볼 수 있으나, 주인공이 너무 늙어서 또 너무 완벽하게 성장해 소설이 끝나기에 좀 ‘과도한’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종교를 다루었고, 그냥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득도를 염두에 두었기에 노년을 종점으로 설정하는 게 불가피했을 것 같기는 하다.
‘인도의 시(詩)’라는 부제가 붙은 것과 ‘싯다르타’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양인의 입장에서 신비로운 동양을 무대로 구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1922년에 발표한 이 장편소설에서 주인공 싯다르타는 바라문 집안에서 출생해 반듯하게 자란 청년이다. 어느 날 그는 주위의 기대와 촉망을 마다하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수행의 길을 떠난다.
제목만으로 이 소설을 접한 사람이라면 <싯다르타>가 부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부처의 실명은 고타마 싯다르타로 고타마가 성이고 싯다르타가 이름이다. 소설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고타마’란 성인으로 따로 등장한다. 소설에서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하나 비중이 크지 않다. 곧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떠나 다시 구도의 길을 간다.
헤세는 고타마 싯다르타를 고타마와 싯다르타로 인수분해한다. 인용문은 고타마의 제자가 된 고빈다와 조우한 싯다르타가 한 말이다. 인용문을 포함하여 싯다르타가 종국에 도달한 깨달음은 고타마의 생각과 달라 보인다.
헤세는 싯다르타란 인물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의 경로를 모색한다. 싯다르타가 가는 길은 불교의 길이 아니고, 부처의 길이 아니다. 인물의 배경도 살짝 다르다. 대표적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는 크샤트리아 계급인데, 소설 속의 싯다르타는 브라만 계급이다.
싯다르타는 힌두교도로서 자아인 아트만(Atman)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Brahman)과 일치,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추구한다. 그러다가 싯다르타는 연기의 사슬을 벗어나 해탈해야 한다고 믿는 고타마의 무아론(無我論)의 가르침을 듣는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두 줄기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고 엉뚱하게 세속에 귀의한다. 정신세계의 최극단을 추구하다가 감각적인 세상으로 들어가 버린다.
거기서 여인을 만나 사랑과 관능을 익히고 상인을 만나 돈과 탐욕을 배운다. 어느 날 다시 문득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속세를 떠난다. 그가 최종적으로 귀의한 곳은 강이다. 직업으로는 뱃사공이다.
힌두교에 관한 깊은 이해 없이 힌두교의 핵심교리인 범아일여를 형식논리학으로 살펴보자면, 같아짐 즉 ‘일여’에 도달하려면 ‘범’과 ‘아’를 모두 알아야 한다. 둘의 실체를 각각 깨우치면서 일치를 모색하는 것까지, 마치 플라톤을 통달한 다음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정통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부처나 소설의 싯다르타 또한 범아일여의 이러한 형식논리학상 난점을 이해한 듯이 보인다. 헤세는 고타마 싯다르타를 둘로 나누면서 부처의 해법과 다른 싯다르타의 길을 독자에게 제시했다. 해탈과 열반을 향해 도움닫기를 하는 대신 싯다르타는 미망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티끌로 이루어진 현존을 파고든다. 인용문은 브라만 대신 현존과 합일하는 경지를 논한 듯하다. 공부의 끝에선 브라만과 현존이 같을지도 모르겠다.
범신론적 각성에 가까운 결말은, 동양보다는 서양에 가까운 사유를 드러냈다는 조심스러운 판단을 끌어낸다.
싯다르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삶 너머에서 삶의 진리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일여나 합일은 두 개의 차이를 깨닫고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임을 억지로 깨닫거나, 삶 너머로 이탈하며 초월적 합일을 이루는 탈속적 방식을 제시한다. 헤세는 이 소설을 통해 일여나 합일 그 자체로 삶을 자각하고 삶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쉽지 않은 구도의 길을 제안한다.
나를 버리는 게 어렵다면 나를 사랑하고, 그 나가 결국 세계 혹은 세계 내 존재임을 인식하라고, 싯다르타가 말한다고 해석한다면 너무 도식적 이해일까. 당말의 고승 임제(臨濟) 의현(義玄)이 말했듯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얘기와 통한다. 삶을 사랑하는 것 말고 인간에게 다른 어떤 깨달음이나 다른 어떤 신박한 정신적 해탈이 없다는 평범한 결론에 도달하는 데 소설에서 평생이 걸린다. 사실 평생이 걸려도 도달할 수 없는 지경이다.
실천이 용이하지 않겠으나,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결심을 해보자. 실패해도 상관없다. 결심은 언제든 새로 알 수 있으니.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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