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이때 이곳 이것’, 고유명사로 지정해![언어의 업데이트]
행복해지는 법 하나를 알고 있다. 세상에 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내가 유일하게 이 방법만큼은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감히, 이 혼돈과 불안의 시대에 ‘행복해지는 법’을 안다고 적으니 일단 나 자신을 검열해보게 된다. 내가 진짜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나? 다시 생각해도 역시 안다. 행복해지는 법은 바로 이거다. 고유명사를 외우는 것. 내 인생에서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다양한 고유명사를 기쁘게 흡수하거나, 단 하나의 고유명사를 내 마음에 심고 그를 틔우고 키우기 위해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던 때다. 이건 너무나 확실한 방법이다.
한 사람이 가장 많은 고유명사를 알고 있는 분야는 그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영역이다.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그냥 ‘들꽃’이 없다.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닌 식물 저마다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책 편집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좋아하는 외국 작가의 번역가 이름을 외운다. 이유는 오직 사랑이다. 존경과 사랑은 고유명사를 바르게 외움으로써,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한다. 억지로 외우라면 외워지지 않을 정보가 사랑을 전제하면 저절로 품어진다.
이것보다 확실한 행복 처방은 없을 거라 확신하던 내가 최근 행복해지는 법을 하나 더 배웠다. 나는 고유명사를 외우는 법만 알았지, 고유명사에 구체성을 더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총 든 김태리’ 고유명사로 지정해”, “‘240811 잠실 시구 차은우’ 고유명사로 지정해”처럼 구체적 상황이나, 날짜, 장면, 숫자를 상징하는 언어나 기호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 ‘고유명사로 지정해’라고 말하는 새로운 ‘주접 멘트’(팬심을 담아 유쾌하게 칭찬하는 방식) 덕분이다. 찰나의 고유함에 존재의 고유함을 더하니 사랑과 행복이 동시에 부풀어 오른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이 버겁고도 벅찬 오늘. ‘덕질’의 언어는 동시대적 표현법으로 건강한 호들갑에 섬세한 존중이 뒷받침되면 얼마나 든든한 지지가 되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입체적 방식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더 소중하게 대하는 관점이자 태도다. 한순간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한 번 더 그 장면을 붙들어 읽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그때, 그곳의 나 자신’을 정성스럽게 기억하고 아껴주는 마음보다 나 자신을 잘 돌보는 법이 있을까?
진짜 좋아하는 책에는 무수히 많은 인덱스가 붙어 있다. 여러 번 읽을 때마다 밑줄을 긋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장마다 밑줄들이 가득하다. 진짜 좋아하는 영화는 모든 장면을 일일이 캡처하고 싶어진다. 대사가 없어도 혹은 있어도. ‘고유명사로 지정해’ 버리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 자신의 순간에 인덱스를 붙이고 밑줄을 긋고 그 순간을 캡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우리 삶 속에 더 많은 밑줄을 그을수록 더 오래 기억될 순간을 얻는다.
나는 이제 행복해지는 법 하나를 더 안다고 확신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유명사만 외우는 게 아니라, 나만의 ‘고유명사를 지정하며’ 세상을 더 많이 기억하는 일이다. 우선 이 여름의 순간들을 돌아보며 고유명사를 지정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칠월의 마지막 아침 여섯 시 군위 논밭의 초록빛’, ‘휴가 전 출근길 아침 아이스 라테의 맛’. 아름다운 순간들을 손에 꼭 쥔 기분이다.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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