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5년 놀았다" 사상 초유의 사태…반전 가능할까 [황정수의 반도체 이슈 짚어보기]
전영현 DS부문장 취임 100일
"근원 경쟁력 회복" 주문
HBM3E 납품 추진 속도
파운드리, 시스템LSI 강화 숙제
"직원 사기 회복은 힘써야"
"초식 공룡 같다", "모든 D램에서 경쟁사에 뒤처졌다", "연구소는 거의 5년 논 것 같다", "시스템반도체는 비상 대책이 필요하다", "SK하이닉스는 우리를 경쟁사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5월 말 유출된 삼성전자 회의록에 들어 있는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의 발언들이다. 전 부회장은 정기 인사 시즌이 아닌 지난 5월 21일 반도체 사업을 책임지는 DS부문장에 전격 취임했다. 위기 상황에 단행된 사상 초유의 인사다. 전 부회장은 각 사업부, 연구소 현안 보고를 받은 뒤 취임 일주일 만에 통렬한 자기반성과 뼈를 깎는 수준의 혁신을 주문했다.
그 후로 약 100일이 흘렀다. 전 부회장은 오는 28일 취임 100일을 맞는다. 그동안 삼성전자 DS부문은 변했을까.
HBM개발팀 정식 출범 "차세대 경쟁력 확보"
전 부회장이 지난달 초 단행한 조직 개편에서 실마리를 확인해볼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팀' 신설이다. 태스크포스(TF) 형태로 흩어져 있던 HBM 전문 인력을 메모리사업부 D램개발실 산하에 모았다.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분석된다.
DS부문의 두뇌 역할을 하는 최고기술책임자(CTO) 산하 연구소 조직에도 변화가 생겼다. 8대 공정 설비 개발을 담당하는 설비기술연구소의 설비 개발 조직은 공정 기술을 담당하는 반도체연구소로 흡수됐다. 두 조직의 시너지를 통해 반도체 공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다.
최근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어드밴스드패키징(AVP·여러 최첨단 칩을 한 칩처럼 작동하게 하는 공정 기술) 전담 조직 'AVP전담팀'은 사실상 해체됐다. 경계현 전임 부문장(현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장 겸 SAIT원장)이 2023년 3월 직속 조직으로 출범시킨 지 약 1년 만이다.
HBM 패키징 관련 인력은 메모리사업부로 갔고, 나머지 인력들은 전통 패키징을 담당하는 TSP총괄이나 각 사업부로 흩어졌다. 부문 직속으로 남겼던 'AVP개발팀'도 최근 TSP총괄로 흡수됐다.
"거짓 보고 하지 마라" 투명한 소통 강조
조직 문화를 바꾸려는 전 부회장의 노력도 여러 발언에서 읽힌다. 그는 지난 7월 DS부문 대상 사내 메시지에서 "문제를 숨기거나 회피하고 희망치만 반영된 비현실적인 계획을 보고하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관의 질타를 피하고 순간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보고하고 더 나가서는 고객사까지 속이는 상황을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전 부회장은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인정하고 도전할 것은 도전하며 투명하게 드러내서 소통하는 반도체 고유의 치열한 토론문화를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분기 개선된 실적에 대해선 '시황이 좋아진 데 따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DS부문은 올해 2분기 매출 28조5600억원, 영업이익 6조450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94%, 영업이익은 흑자로 전환했다.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실적이지만 전 부회장은 '근원적인 제품·기술 경쟁력 회복'을 강조한 것이다.
'선택과 집중' 전략도 최근 전 부회장의 행보에서 읽힌다. 전 부회장은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메모리를 제외한 제품·서비스, 파운드리와 시스템LSI사업부) 중 메모리 경쟁력 회복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서울, 도쿄, 실리콘밸리 등을 돌며 개최하는 파운드리 포럼 행사를 대폭 축소하고 네덜란드 ASML의 신(新) 장비인 하이-NA EUV 도입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알려진 것도 전 부회장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HBM3E, HBM4 엔비디아 납품은 숙제
전 부회장의 100일과 DS부문의 미래에 대해선 긍정론과 우려와 엇갈린다. 기술과 제품 경쟁력 측면에서 아직 드라마틱한 변화는 찾을 수 없다. 물론 100일 만에 큰 성과를 기대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시장에선 삼성전자에 대한 '우려'가 여전하다.
우선 삼성전자의 범용 메모리반도체 생산능력(캐파)이 경쟁사의 1.5배를 웃도는만큼, 겉으로 보이는 실적은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호황기에는 공급보다 수요가 커지고, 이 주문을 캐파가 큰 삼성전자가 독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D램 경쟁사 SK하이닉스가 HBM에 주력하고 있고 낸드플래시 맞수 키옥시아 등은 누적된 적자로 제대로 된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만큼 삼성전자의 상승세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요한 건 전 부회장이 강조한 '근원 기술 경쟁력'이다. 대표적인 게 5세대 HBM인 'HBM3E' 8단과 12단 제품. 삼성전자는 AMD와 일부 AI 반도체 스타트업엔 HBM3E를 공급할 계획이다. 물량은 전체 시장 수요의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요한 건 AI 가속기 시장의 95%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엔비디아에 납품하는 것이다. 아직 납품 소식은 안 들린다. 이미 HBM3E 8단 제품을 엔비디아에 납품하고 있는 SK하이닉스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전 세대 모델인 HBM3 납품엔 성공했기 때문에 HBM3E도 결국 공급하게 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중요한 건 시점과 물량이다. 12단을 가장 먼저 납품하게 된다면 분위기 반전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8단에 이어 12단에서도 SK하이닉스에 선수를 빼앗긴다면, 삼성전자의 공급 물량은 엔비디아 수요의 20~30% 수준에 못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내년 하반기 양산이 시작되는 6세대 HBM 'HBM4'는 분위기 반전을 노리는 삼성전자에 기회가 될 전망이다. 오롯이 전 부회장의 공과로 평가될 전망이다. HBM4부터는 로직다이를 파운드리 기업이 만드는데, SK하이닉스는 TSMC와 손을 잡은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사업부에서 담당하게 된다. GPU와 HBM, CPU 등을 연결하는 최첨단패키징의 중요성도 커진다. 시장에선 각 분야 1위 기업인 SK하이닉스-TSMC 연합군의 우세를 점치는 목소리와 각 사업부 간 시너지 창출이 가능한 삼성전자가 선전할 것이란 관측이 함께 나온다.
이밖에 DDR5 등 최신 D램의 제품 경쟁력 강화와 CXL(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 PIM(프로세싱인메모리, 메모리반도체에 연산 기능을 더한 것) 차세대 메모리 시장 선점도 과제로 꼽힌다.
파운드리, 시스템LSI 정상궤도 올려야
파운드리와 시스템LSI사업부를 정상궤도에 올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2019년 4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에 오르겠다"며 '비전 2030'을 꺼냈다. 현재까지 뚜렷한 결과는 안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점유율은 2분기 기준(카운터포인트리서치 조사) 13%에 머물러있다. 최첨단 공정에선 첨단 기술을 빠르게 개발하며 TSMC와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고객 확보에 어려움이 작지 않다. 최근 AI 반도체 스타트업과 글로벌 자동차 칩 전문 고객사 등으로부터의 주문이 늘고 있지만 대형 고객사의 '한 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시스템LSI사업부도 마찬가지다. 주력 사업은 센서 설계, 디스플레이구동칩(DDI) 설계, '엑시노스'로 대표되는 통합칩세트(SoC) 설계다. 센서와 DDI는 각각 세계 2위,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최근 주요 납품처인 스마트폰과 TV 사업이 살아나지 않고 있는 점이 리스크로 꼽힌다. SoC와 관련해선 올해 갤럭시 S24에 들어간 '엑시노스 2400'의 선전을 차기작 '엑시노스 2500'에서 이어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삼성전자 안팎에선 대만 미디어텍의 부상으로 시스템LSI사업부의 입지가 약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이밖에 AI 가속기 프로젝트 '마하' 시리즈를 차질 없이 잘 이어가는 것도 과제로 평가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시스템LSI의 설계 역량, 파운드리의 생산 경쟁력이 '시너지'를 낼 수 있어야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사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며 "경쟁사 대비 인력과 투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한 목표를 던지는 게 아닌지도 잘 살펴야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각각 다른 공정에서 양산된 칩을 연결해 최적의 성능을 내게 하는 '칩렛' 기술과 이를 활용한 AI 가속기, D램을 쌓는 HBM 등의 등장으로 중요성이 커진 '최첨단패키징' 관련해선 우려가 작지 않다. 삼성전자는 부인하지만 반도체업계에선 "전 부회장이 조직 개편을 통해 AVP사업팀을 사실상 해체시킨 것"이란 평가가 있다. TSMC, 인텔 뿐만이 아니라 UMC 같은 4~5위권 업체도 최첨단패키징에 주력하는 상황에서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가라 앉은 조직 사기 회복 급선무
무엇보다 사기가 꺾인 DS부문 직원들을 어루만지고 사기를 끌어 올려야하는 게 전 부회장이 풀어야할 가장 큰 숙제란 지적도 나온다. 현재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노조 조합원은 전체 DS부문 직원(7만7474명)의 약 46% 수준인 3만6000명까지 증가한 상황이다. 최근엔 정치색이 짙은 민주노총이 전삼노 집행부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전삼노와 민주노총이 삼성전자를 '피해를 줘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파업을 통한 생산 차질' 등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영향으로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직원들의 근로 의욕이 많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삼성 안팎에서 나온다.
전 부회장은 지난 5월 취임사에서 "최근의 어려움은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저력과 함께 반도체 고유의 소통과 토론의 문화를 이어간다면 얼마든지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저는 부문장인 동시에 여러분의 선배고 삼성 반도체가 우리 모두의 자부심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취임 100일을 향해가고 있고 사내 메시지를 통해 소통의 중요성을 나타낸만큼 DS부문장이 직접 경영 현황 설명회 등을 통해 직원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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