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정국’ 푸는 여야 대표 회담?… 과거 사례는 [여의도가 왜 그럴까]
지난 한 주 여의도 정가의 가장 큰 관심사는 국민의힘 한동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간 회담이었다. 이 대표의 코로나19 확진으로 25일 예정됐던 회담은 일단 순연됐지만, 양측 의지가 강해 취소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번 회담은 22대 국회 초반부터 꽉 막혔던 정국을 풀 계기를 마련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야당의 단독 원 구성부터 시작해 ‘야당 입법 강행-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재의결’ 과정을 쳇바퀴 돌듯 되풀이해왔던 여야는 최근 전세사기특별법을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합의 처리하는 등 협치의 물꼬를 텄다.
한 대표는 23일에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미래 국가 청년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 수료식’에서 “지난 한 달 제가 많이 참았다”며 “그때그때 어떤 정치 공방에 불씨를 계속 살려 그 온도를 높여 가는 것보다 금투세 폐지 논의 같은 민생을 여야 정치의 전장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정치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정국의 뇌관인 ‘채 상병 특검법’ 문제와 여야가 샅바 싸움을 벌이고 있는 회담 형식의 문제가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빈손’으로 끝난 줄 알았던 11년 전 회담
과거에도 꽉 막힌 정국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여야 대표가 머리를 맞댄 일이 종종 있었다. ‘역시나’로 끝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평가가 나왔던 적도 있는 반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경우도 있었다.
김 대표는 회담에서 국가정보원 개혁 특위 구성을 제안했다. 대선개입 특검에 대해서는 ‘여야 4인 협의체’를 구성해 논의하자고 했다. 황 대표는 “당내 의견을 물어 3, 4일 안에 답을 주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황 대표는 새해 예산안 법청 처리시한(12월2일)을 앞두고 정쟁과 예산안 심의는 분리해서 가자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는 김 대표가 속시원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회담은 50분 만에 종료됐다. 결국 양측 이견만 확인된 ‘빈손 회담’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며칠 뒤 여야는 4자 회담을 통해 절충점을 찾았다.
그해 12월3일 여야 대표 및 원내대표가 참석한 회담을 통해 △예산결산특위 등 각 상임위 재가동 △국정원 개혁 특위·정치 개혁 특위 여야 동수 구성 등에 합의한 것이다. 첨예한 쟁점이었던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위한 특검 도입 문제는 추후 계속 논의키로 해 논란의 불씨를 남겼지만, 여야가 각각 주고 받기를 통해 정치적 타협을 이뤄낸 셈이었다.
◆사상 첫 ‘새 정치 협약’ 내놓은 20년 전 회담
이보다 9년 전인 2004년 5월3일에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간 회담이 열렸다.
앞서 정 의장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철회 문제 등을 논의하자며 회담을 거듭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않다가,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 여야 대표가 머리를 맞대게 됐다.
두 사람은 2시간20분가량 회담을 통해 ‘새로운 정치와 경제발전을 위한 여야 대표 협약’이라는 성과물을 내놨다. 협약에는 △민생 우선·경제 우선 △부패 정치와의 완전 절연 △원칙과 규칙에 입각한 국회 중심의 의회주의 정치 구현 등 3대 기본원칙이 제시됐다.
두 사람은 아울러 △국회 내 규제개혁 특위 신설 △재래시장육성 특별법(가칭) 제정 추진 △국회 내 외부인사 참여 윤리위원회 구성 △전원 외부인사로 구성되는 선거구 획정위원회 구성 등에도 합의했다.
여야가 공동발표문이나 합의문이 아닌 협약 형태로 합의 내용을 발표한 것은 정치적 구속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협약에 합의한 것은 여야 대표 회담 역사상 처음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문제로 격렬히 대치하던 여야가 ‘상생 정치’의 물꼬를 텄다는 기대감이 커지는 대목이었다.
다만 두 사람은 남북관계, 국가보안법, 언론개혁 등 민감 현안을 두고는 이견만 확인한 채 회담을 마무리해 한계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회담 후 정 의장은 “진지하고 생산적인 회담이었고 회담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실천에 매진해야 한다”고 했다. 박 대표도 “새로운 정치를 위해 반드시 실천하기로 합의했다”고 강조했다.
결국 ‘실천’이 없다면 합의문이 휴지조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데 여야 대표가 입을 모은 것이다.
거대 양당 원내대표끼리는 수시로 만난다. 그래도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하며 정국 경색이 길어질 때 당대표가 ‘구원투수’처럼 등장하곤 한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 7월,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만나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방안에 대해 원칙적 합의를 이룬 바 있다.
2015년에는 부산 경남중 선후배 사이인 새누리당 김무성,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독대, 2+2(당대표+원내대표)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자주 만났다. 2015년 6월 메르스 사태 와중에는 4+4 회담을 통해 ‘메르스 확산 방지와 국민 불안 해소를 위해 여야는 초당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합의문을 내놓았다.
김무성·문재인 대표는 추석 연휴 때인 2015년 9월28일 부산에서 긴급 회동을 하고 안심번호에 기반한 ‘오픈프라이머리(국민개방 경선)’에 전격 합의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선거 연령 확대 △투표 시간 연장 △투·개표 신뢰성 확보 등에 관한 추가 합의 여지도 남겼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현재 한동훈·이재명 대표가 갖춘 조건은 2015년 9월 당시와 많이 다르다고 짚었다. 국민의힘 한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6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된 지 얼마 안 된 ‘강한 당대표’이고, 윤석열 대통령과 당내 친윤(친윤석열)계의 위상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에 비해 약하며, 민주당 이 대표는 역대 어느 당대표도 넘보기 어려운 강력한 ‘당내 장악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은 ‘차기 대권주자’라는 점을 의식한 상태에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윤 실장은 “여야 대표 회담은 원내에서 해결하지 못한 교착 상황을 톱다운 형식으로 풀기 위해 이뤄지곤 했다”며 “정치에선 ‘욕심’이 있어야 뭔가가 풀리곤 하는데, 두 사람에겐 욕심이 있다. 회담을 통해 여야 간의 분위기만 바꾸더라도 서로에게 윈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제 개편, 민생회복지원금법, 채 상병 특검법 등 여러 쟁점을 일괄타결 형식으로 단숨에 푸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면서 정쟁·대치 일변도의 여야 관계에 변곡점을 그릴 가능성은 작지 않다는 설명이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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