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흔해 빠진 파인애플의 역사
요즘 뷔페식당이나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인 파인애플. 하지만 처음 파인애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큰마음 먹고 사 먹는 비싼 과일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마트서 장을 보면 가장 쉽게 담을 수 있는 과일, 바나나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너무 쉽고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이 과일들을 산지가 아닌 바다건너 대륙건너 한국에서 먹을 수 있게 해준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돌’인데요.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주인공은 ‘파인애플 킹’이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 제임스 돌입니다.
하버드 농대 졸업한 돌, 하와이로 가다
제임스 돌은 187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자메이카플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럽인들의 북미 대륙 이주 초기부터 자리 잡은 미국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찰스 플레처 돌은 목사였고 외할아버지 역시 성직자인 제임스 드러먼드입니다. 그는 록스버리 라틴 스쿨을 졸업한 뒤 하버드 대학교에서 농업학을 전공하며 농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99년 학교를 졸업한 돌은 졸업 선물로 받은 50달러를 저축하기 시작하며 사업가의 꿈을 키웁니다. 이후 꾸준히 돈을 저축해 1만6240달러를 모은 그는 22세의 나이에 태평양에 위치한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사합니다.
하와이를 뒤흔든 두명의 돌
그가 사업을 위해 하와이로 간데에는 또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원래 하와이는 원주민들이 평온하게 살아온 곳이었습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이 바다를 건너 정착한 뒤 이 곳 원주민들이 부족을 이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카메하메하 1세가 하와이 제도를 통일했고 이후 왕조를 이어가며 하와이를 지배해왔습니다. 하지만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온 미국인들이 점차 늘어나며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심화했습니다.
결국 샌퍼드 돌을 비롯한 미국계 이민자들이 중심이 돼 하와이 왕국을 몰아내고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합니다. 그리고 샌퍼드 돌은 초대 하와이 대통령으로 추대됐고 결국 하와이 준주 주지사를 지냈습니다. 미국 정부는 50여년이 지난 1959년 결국 하와이를 50번째 주로 편입하며 알래스카와 더불어 미국 본토와 떨어져 있는 유이한 주로 승인받습니다.
그리고 샌퍼드 돌의 조카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제임스 돌입니다. 샌퍼드 돌은 하와이의 농장부지를 제임스 돌에게 줬습니다. 어쩌면 하와이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분노의 대상인 게 당연할 듯 합니다.
파인애플 승부수로 성공가도 달리다
농업에 대한 전문지식에다 64에이커에 달하는 드넓은 농지를 확보한 제임스 돌은 곧바로 여러 농작물을 심어봅니다. 그 결과 파인애플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의 농사는 제법 성공적으로 이뤄집니다. 가장 달콤하면서 과즙이 많은 과일인 파인애플은 하와이에서 재배하기 매우 좋았습니다.
제임스 돌은 파인애플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이 과일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방법이었던 통조림 기술을 도입하여 파인애플을 가공해 장기간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와히아와 마을에 통조림 공장과 포장 공장을 건설해 신선한 파인애플을 멀리 미국 본토까지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통조림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제임스는 포기하지 않고 기술을 개선하며 품질 좋은 통조림 파인애플을 생산해 냈습니다.
미국 본토 공략나선 파인애플
1901년, 파인애플 재배를 성공적으로 시작한 그는 하와이안 파인애플 컴퍼니(Hawaiian Pineapple Company)를 설립했습니다. 그의 파인애플은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사업은 점차 성장했습니다. 1907년, 그는 파인애플 캔 공장을 호놀룰루 섬으로 이전하고, 파인애플 판매를 위해 미국 잡지에 광고를 싣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파인애플을 판매하겠다는 그의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 이는 미국 전역의 소비자를 대상으로한 최초의 광고 캠페인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생소했던 파인애플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습니다.
수요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딱딱한 파인애플 껍질을 벗기고 심지를 제거하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녔습니다.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달라붙어 하나하나 파인애플을 까는 일은 중노동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던 1911년 돌의 기술자인 헨리 지나카는 1분에 파인애플 100개의 껍질을 벗기고 심지를 제거하는 기계를 발명했습니다. 완전히 기계화된 파인애플 캔 제조 공정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이 기계는 아예 지나카라는 이름이 붙었고 현재 파인애플 산업의 표준 기술이 됐습니다.
파인애플 왕이 된 돌
1922년 돌은 보스턴에 있는 가족들을 설득해 상당한 투자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와이의 라나이 섬을 매입하고 섬 전체를 파인애플 농장으로 개발했습니다. 2만 에이커에 달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파인애플 농장이 만들어지며 사실상 파인애플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으로 발전됐습니다. 이렇게 라나이 섬은 전 세계 파인애플 작물의 75% 이상을 생산하며 시장을 지배했고 파인애플 섬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1927년 비행 기술의 발전으로 돌은 그간 배를 통해 운송했던 파인애플 캔을 항공운송을 통해 나르는데 성공합니다. 파인애플 제국을 완성한 돌의 사업은 승승장구 그 자체였습니다.
대공황으로 무너진 돌, 은퇴의 길로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토지, 기계설비, 항공 운송 등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돌은 파인애플 과공급으로 인한 가격 하락으로 위기를 맞이합니다. 게다가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대공황이 찾아오며 파인애플의 인기도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1932년 제임스 돌은 회사경영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리고 하와이내 큰 회사 중 하나였던 캐슬앤쿡이란 회사가 하와이안 파인애플 컴퍼니의 지분 21%를 인수해갑니다.
위기를 맞이했지만 제임스 돌의 상표 가치는 무척 높았습니다. 이듬해인 1933년 회사는 제임스 돌에 대한 명성과 높은 품질을 인지하고 처음으로 파인애플과 주스 등에 유명한 ‘Dole’ 도장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하와이 내부에서 샌퍼드 돌에 대한 악명탓에 샌퍼드는 제임스에게 회사 이름이나 브랜드로 ‘돌’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가장 유명한 2명의 돌가(家) 사람들의 영향력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임스 돌은 이후 1948년 공식적으로 은퇴하며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뇌졸중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그는 1958년 그가 파인애플 왕국을 세운 하와이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가 죽은 후 돌은 1961년 캐슬앤쿡과 합병했습니다. 하지만 돌이라는 브랜드는 계속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돌은 2012년 사업 부진 등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포장식품 및 아시아 농산물 사업 전체를 일본의 이토추에 매각했습니다.
지금도 하와이를 가보시면 돌의 생애와 그가 남긴 유산들을 둘러볼 수 있는 돌 파인애플 농장 투어가 있습니다. 다음에 하와이에 가시면 한번 들러봐도 좋을 듯 한데요. 하와이 왕국을 무너트린 가문이자 또 하와이를 대표하는 산업을 만든 가문이기도 한 돌가.
돌이 회사를 세울 때 “우리는 품질, 품질, 또 품질을 중요시하여 이 회사를 설립했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돌은 이제 없지만 맛있는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사실 만큼은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