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가을의 첫 발자국, 사진으로 담아내다[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8. 24.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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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75

100년 전 가을을 기다리며: 당신의 마음에 남은 풍경은?

신문에 실리는 사진 중에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진기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찍는 사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툭 찍는’ 사진도 있습니다. 치열한 현장을 오가거나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을 때 우연히 아름다운 장면을 만나면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들어 순간을 포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설명을 붙여 신문에 게재하거나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2024년 현재 기준 동아일보에는 포토에세이나 고양이눈이라는 사진칼럼이 그런 사진들이 활약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이번 주 백년 사진에서는 날씨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100년 전 지난 주 신문에는 툭 찍은 듯한 사진이 꽤 많이 실렸습니다. 날씨 스케치 사진이 1주일에 무려 3장이나 실렸더라구요. 하루치 신문이 4면이나 6면에 불과하고 일주일치 사진이라고 해봐야 지면 전체를 통틀어 20장이 넘지 않는 상황에서 날씨 사진만 3장이 실린 것은 이례적입니다. 100년 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가을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고 그걸 사진으로 보여주려던 기자들도 많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좀 더 높은 해상도로 사진이 보관되어 있었다면 더 생생한 장면을 여러분에게 소개시켜 드릴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아 아쉽습니다. 저화질의 사진이지만 여러분이 눈을 감고 상상해 보시면 훨씬 생생한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까요?

첫 번째 사진은 1924년 8월 18일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교외의 첫 가을
카메라 앞에 큰 나무가 무성한 잎을 늘어뜨린 채 서 있고 왼쪽 저 멀리 둥근 모양의 두 그루 나무가 원근감을 보여주며 작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에 자리 잡은 나무는 여름의 마지막 숨결을 담아낸 듯, 무성한 잎사귀를 가지 끝에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그 위용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서 있는 반면, 멀리 시야 끝에 보이는 두 그루의 둥근 나무는 서서히 다가오는 가을의 첫 발자국을 암시하듯 작고 은은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화면 속에서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자연이 그리는 계절의 변화를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가까이의 무성함과 멀리의 잔잔함이 대비를 이루는 이 장면은, 여름의 뜨거움 속에서도 이미 찾아온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감지하게 하며, 시간이 흘러감을 느끼게 하는 서정적인 풍경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두번째 사진은 1924일 8월 20일 사진입니다.

가을 맞는 수수 이삭
같은 계절에 파종을 했으니 실제로야 같은 크기로 서 있을테지만 사진에서는 역시 왼쪽의 수수는 아주 크고 오른쪽 세 개는 작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망원렌즈가 아니라 광각(wide) 렌즈로 촬영해 화면의 리듬감을 주려고 했을 겁니다.

왼편에 우뚝 서 있는 수수 이삭은 마치 여름의 잔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 뒤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수수들은 마치 겸손하게 가을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광각 렌즈가 선사하는 이 독특한 시점 덕분에, 화면 속 풍경은 리듬감을 지닙니다. 마치 자연이 시간의 흐름을 춤추듯 표현하는 듯합니다. 가까운 수수는 자신감을 담아 당당하게 서 있지만, 멀리 보이는 수수들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 사진 속에서 자연은 한 계절의 끝과 다른 계절의 시작을 함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1924년 8월 23일 사진입니다.

저녁 바람을 맞으며 = 한강철교 소견
지금도 서울의 상징 중 하나인 한강철교 부근 강변에서 여성 두 명이 산책하고 있습니다. 둥근 가로등이 구름 낀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 하늘은 아마 붉은 파스텔톤이지 않았을까요?

둥근 가로등은 그들 곁에서 은은한 빛을 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평화를 상징하듯 서 있습니다. 여인들의 모습은 이 순간의 고요함을 담아내며, 그저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자연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듯합니다. 가을로 넘어가는 저녁, 한강 위에 서린 여유로움과 평온함이 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소견이라는 표현은 지금은 신문사 기자들이 잘 안 쓰는 표현입니다. 소견(所見):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이라고 사전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장의 사진 모두 일반적인 사진과 달리 사진 설명이나 관련 기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냥 한 줄짜리 제목만 달려 있습니다. 무책임한 걸까요? 그것보다는 독자들 각자 가을 풍경을 만끽하면서 나름대로의 시상을 떠올리도록 넌지시 여백을 남겨 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100년 전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을 맞이하던 우리나라의 풍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이 보이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진짜 이번 주만 지나면 가을이 오려나요. 폭염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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