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문제는 돈·무능이 아니라 소통이에요
쫓겨났다 부자 돼 돌아온 아버지
아내와 재결합 원하며 딸과 대결
‘아버지의 돈’은 남성 판타지 대변
‘모녀 보호가 가부장의 효용’ 거북
‘가족 ×멜로’(제이티비시)는 “내다 버린 아빠가 건물주가 되어 돌아왔다”라는 강렬한 로그라인을 앞세운 12부작 가족극이다. 드라마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 가족을 가난으로 내몰아 집에서 쫓겨났던 무능한 아버지가 어떻게 갑자기 부자가 되었을지를 둘러싼 의혹이 한 축을 차지한다. 또 한 축은 어머니와 재결합을 원하는 아버지를 막아서는 딸과의 대결이다. 어머니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딸의 삼각관계라니, 본 적 없는 구도다. 드라마는 짠내 나는 모녀의 현실을 묘사하다 황당한 아버지의 귀환으로 분위기를 급반전시키고, 유쾌한 코믹 터치로 풀어간다. 손나은, 지진희, 김지수, 최민호의 고른 호연이 돋보인다. 특히 지진희의 능청스럽고 무책임한 한량 캐릭터의 묘사는 과거 영화 ‘집 나온 남자들’(2010) 때를 보는 듯하다. 드라마는 풀어야 할 이야기를 많이 남겨두었지만, 노골적으로 가부장제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나쁜 아버지’의 애매한 유형
변미래(손나은)는 엄마와 남동생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다. 아버지는 11년 전 이혼했다. 사업을 여러번 말아먹은 아버지에게 고등학생이던 변미래는 “꺼지세요”라며 집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라마는 금애연(김지수)과 변미래가 빠듯하지만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알콩달콩 그린다. 어느 날 이들이 사는 낡은 빌라 건물에 불이 나서 집주인이 죽고, 갑자기 집주인이 바뀐다. 느리게 흘러가던 서사는 1회 마지막에 급물살을 탄다. 1년 전 죽은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사를 지내는 도중, 현관문으로 아버지가 걸어 들어온다! 놀라 쓰러지는 금애연을 화려한 탱고를 추듯 받아안은 변무진(지진희)은 자신이 새로운 집주인이라고 밝힌다.
변무진은 금애연과 재결합을 원한다며, 같은 빌라 건물에 이사 와서 산다. 아버지 없이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던 가정에 부자 아버지의 귀환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던 변미래는 이사를 하겠노라 선언한다. 금애연은 월세 70만원을 받지 않겠다는 변무진의 제안에 이사를 접는다. 이혼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 변현재(윤산하)는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이 별로 없으며, 부자 아버지가 생겼다는 기쁨에 희망이 부푼다. 변무진은 금애연을 놓고 변미래와 대결하다 급기야 내기를 한다. 4주 안에 재결합에 성공하지 못하면 빌라 건물을 넘기겠다고.
변무진은 나쁜 아버지인가? 그간 나쁜 아버지라 하면 폭력적인 아버지가 자주 등장했다. 가령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에서 아버지는 가족을 자신의 부속물로 취급하고, 절대 헤어져주지도 않으며, 도망쳐도 끝까지 찾아내 응징하는 극악무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극단적인 형태의 ‘폭군형’ 나쁜 아버지 되시겠다. 그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폭력 성향이 있거나 술 마시고 패악질을 일삼는 아버지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세상에는 폭력 성향은 없지만, 경제적으로 자식 등골을 빼먹는 ‘백수형’ 나쁜 아버지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내 딸 서영이’(2012)에 나온 아버지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외환위기 때 실직한 뒤 여러번의 사업 실패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심지어 딸이 고등학교도 자퇴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모은 학비에도 손을 댔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는 쓰러진 엄마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버지의 노름빚은 계속 늘어났다. 대학생이던 딸은 휴학을 밥 먹듯 하며 모은 등록금 420만원을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내놓으며 애원하듯 의절했다. 역시 극단적인 경우인데, 그보다 강도는 약해도 여러번 사업이나 투자에 실패하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오랜 기간 실직으로 경제적 무능이나 파산 상태에 빠져 가족을 고생시키는 나쁜 아버지들이 있다.
‘상남자 요건, 돈과 힘’ 믿는 남자들
변무진은 ‘백수형’ 나쁜 아버지의 중등도 버전으로 보인다. 폭력 성향도 없고, 협의 이혼으로 깨끗하게 헤어져주었다. 사업 실패가 여러번인데, 그러는 동안에도 아내와의 사이는 나쁜 편이 아니었고 늘 붙어 다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돈을 털어 아내가 낸 분식집은 잘되었지만, 변무진이 쓴 사채 빚이 발목을 잡아 집과 가게를 날렸다. 이혼 뒤 그는 가족과 절연했으며, 아내는 빈손으로 두 자식을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하였다.
변미래 모녀의 일상은 리얼리티가 넘치는 반면, 변무진의 돈은 비현실성이 가득하다. 이런 부조화를 어찌 보아야 할까. 변무진이 어떻게 거액을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상적인 사업이나 투자가 아닌) 갑작스럽고 우연한 경로로 획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우연의 구멍이 크게 느껴질수록 드라마 전체가 어쩌면 경제적 무능으로 주눅 든 남성의 소망 충족적 판타지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나는 나쁜 아버지가 아니고, 단지 돈을 벌지 못하는 아버지일 뿐인데,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족에게 환영받을 수 있다’고 자위하는 남성의 백일몽을 드라마로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무진은 정말로 ‘단지 돈이 문제였을 뿐’ 그때도 아내와 애정이 있었고, 지금도 애정이 남아 있기에 충분히 재결합이 가능하다고 믿고 직진한다.
변무진은 돈의 효용을 잘 알고 쓰며 즐긴다. 그가 빌라 방화와 관련 있을 거라는 주민들의 의심도 돈으로 잠재운다. 아들에게도 금애연에게도 돈을 ‘플렉스~’ 하며 마음을 얻으려 한다. 드라마는 그런 ‘돈질’이 어느 정도 먹히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묘사는 무능한 남자의 백일몽을 추인한다. ‘역시 남자의 능력은 돈이야’ 하는 단순 명제는 ‘그러니까 나한테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돈이었다’는 안도로 귀결된다.
변무진이 남성 판타지를 대변하는 존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근력 자랑이다. 그는 팔뚝에 잉어 문신을 새기고, 턱걸이를 해 보인다. “나는 돈도 있고, 힘도 있다”고 대놓고 말한다. 요컨대 남자들이 믿는 상남자의 요건은 돈과 힘인데, 변무진이 바로 그것을 자랑한다. 이는 변미래에게 나타난 남자 남태평(최민호)에게서도 변주된다. 남태평은 첫 만남에서 변미래를 업고 뛰었다. 이후 계속 그의 운동 능력이 강조되더니, 사장 아들임이 밝혀진다. 변무진과 남태평은 돈을 버는 능력은 없지만 돈과 우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운동선수 출신이다. 즉 ‘몸은 좋고’, 이유야 어쨌든 ‘돈은 있는’ 남자다. 남성이 생각하는 추상적 상남자(‘아마 여자들이 좋아서 껌뻑 죽겠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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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지금도 ‘지극히 일방적’
더 거북한 것은 변무진이 가부장의 효용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사건이다. 가장의 자리를 놓고 대결하던 딸이 자괴감에 빠진다. 변무진이 이웃 남자를 혼내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혼으로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없어졌을 때, 어머니는 성폭력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것을 청소년기 딸과 아들이 모두 알았지만, 가해자를 응징하지 못했다. 이는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실제로 취약 계층 여성들이 겪는 폭력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남자가 여자들에게 세상의 폭력과 성적인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명분으로 가부장을 자처한다. 남성 일반이 여성 일반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수호자가 필요 없다. 그러나 강간 문화가 사라지지 않으면, 다른 남자의 폭력을 막기 위해 가부장이 필요해진다. 남성 권력이 강화되는 악순환이다. 드라마는 변미래가 자신이 하지 못한 가장의 역할을 변무진이 한 것을 알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으로 그린다. 모녀 가정에 아버지가 필요한 이유로 외부의 폭력에 응징할 필요를 드는 셈인데, 이것 역시 남성의 논리로 읽힌다. ‘여자들끼리 재미나게 잘 산다고? 남자가 없으면 누가 지켜주나? 너희를 강간하려는 나쁜 놈들을 누가 혼내주냐고?’
변미래는 왜 아버지를 끔찍하게 싫어할까. 집안을 망하게 해서 엄마를 고생시켰으니까? 그게 전부일까. 어린 변미래에게 아버지는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만, 변미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며, 딸은 일찌감치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회상 장면에서 금애연은 변무진에게 “넌 아무것도 하지 마. 뭐 할 거면 나랑 먼저 상의하고 해, 꼭.” 하고 다짐한다. 변무진이 덥석덥석 사업을 벌인 것이나, 사채를 쓴 것은 상의 없이 저지른 일일 것이다. 현재 재결합을 요구하며 돈을 써대는 방식도 지극히 일방적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도 무능이 아니라, 소통이 문제다.
“저는 아버지가, 큰돈을 버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이기를 바랐어요. 늘 집에 들어오는, 한달에 50만원을 버는 아버지이기를!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견디시지 못했다고요. 지금도요!” ‘내 딸 서영이’에서 딸의 대사이다. 서영이가 아버지와 의절한 진짜 이유도 ‘무능’이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나쁜 아버지들이 ‘나는 아무 문제가 없고, 단지 돈이 없어서 가족에게 무시당하고 버림을 받는다’고 착각한다. ‘그 돈만 생기면 사랑도 얻고 가족의 인정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단꿈을 꾼다. 그래서 ‘그 돈을 한방에’ 얻기 위해 더 어리석은 짓을 더 오랫동안 한다. 그런데 정말 그게 문제였을까. ‘내 딸 서영이’가 나온 지 12년이나 지났는데, 나쁜 아버지들은 뉘우침도 없이, 더 괴상한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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