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예산 '미나리'에서 2000억 블록버스터 '트위스터스'로
[박꽃의 영화뜰]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국내 관객에게는 제목만 들어도 바로 무슨 내용인지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 된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2021)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시장인 할리우드에서 탄생했고,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 플랜B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윤여정이라는 오스카상 수상자를 배출한 뒤 제작비가 고작 20억 원인 '초저예산' 예술영화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더 놀라움을 전한 건 물론이다. 그런 이력으로 이름을 알린 정 감독이 지난 14일 우리 돈 2000억 원을 훌쩍 넘기는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트위스터스'를 들고 극장가로 돌아왔으니, 대부분은 낯설고 놀라운 마음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미나리' 다음 작품이 어떻게 '트위스터스'가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던 모양인지, 정 감독은 지난 15일 씨네21에서 공개한 영상 인터뷰에서 '두 작품 모두 기본적으론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짚었다. 다만 여러 취재를 거치며 다양한 영화감독의 언어를 두루 들어볼 수 있었던 입장에서 보면, 그건 저예산 영화 데뷔 이후 규모 있는 상업영화로 경력을 '확장 이전'해 나가는 감독의 무난하고도 관행적인 언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영화 중에 인간에 대한 이야기 아닌 작품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예상하겠지만 두 작품은 규모와 장르 면에서 너무나 판이한 영화고, 그 특성에 따라 같은 감독의 손길을 거쳤음에도 그 결이 크게 다른 작품이 됐다. '미나리'는 미국 주류사회와는 구별되는 한국인 이민 2세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경험과 정서를 녹여낸 예술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흥행을 우선한 작품은 아닌 만큼 큰 위험을 질 필요 없는 20억 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제작됐을 텐데, 이 돈은 넷플릭스가 한 시리즈의 '1회차' 제작비로 소진하기도 하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돈이다. '미나리'의 배우와 스태프가 단체 숙소 대신 미국 현지에 에어비앤비를 빌려 가족처럼 모여 생활했고 매일 음식까지 함께 만들어 먹었다는 일화 역시 지극히 소규모였던 프로덕션 과정을 짐작하게 했다.
반면 '트위스터스'는 마케팅비를 제외한 순제작비만 1억5500만 달러(한화 약 2066억 원)로 알려져 있다. 정 감독도 '미나리'의 100배가 넘는 돈이 투입된 때에는 '흥행'이 가장 중요한 평가지표가 된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앞선 인터뷰에서 “가족 단위로 영화관을 찾는 여름이라는 특별한 시장에 개봉할 걸 알고 있었다”고 했고 “때문에 좀 더 재미에 초점을 맞춘 오락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미나리'처럼 소수의 경험을 다수에 공유하는 '의미'에 중점을 둔 작품이 아니라, 보편적 다수에 해당하는 평범한 미국인 가정 구성원 모두가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는 '흥미와 공감대' 쪽에 중점을 뒀다는 의미다. 그러니 '트위스터스'가 비교적 매끈한 재난물로 완성됐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전형적이라는 인상을 함께 남긴다는 점 역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예산 영화에서 상업영화로 경력을 확장·이전하는 흐름은 기실 영화감독으로서는 끊임없이 선호할 수밖에 없는 방향이기도 하다. 정 감독의 경우 '트위스터스'로 북미 박스오피스 1위(7월19~25일)에 오르면서 시장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냈는데, 이는 다음 작품에 착수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안정상태에 진입했다는 의미와도 같다. '창작자'라는 정체성 안에서 더 많은 관객과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망을 성사했다는 점도 뜻깊을 만하다.
앞서 언급한 정 감독의 영상 인터뷰 대담자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이 섭외됐는데, 이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 엄 감독 또한 '잉투기'(2013)라는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든 뒤 가능성을 인정받아 200억 원 규모의 대규모 상업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작은 영화로 시작해 큰 영화로 가지를 뻗어나는 일종의 '영화감독 성장사'는 익히 관찰되는 일인 셈이다.
다만 그 여정이 관객 모두에게 여지없는 만족만을 남기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궁금증이 생기는 지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과연 '미나리'의 정 감독의 연출이 '트위스터스'로 확장했을 때, 우리는 기존의 흔한 블록버스터들과 무엇을 달리 볼 수 있는가. 몇몇 평론가들이 '미나리' 시절의 고유한 정서를 '트위스터스'에서 찾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토네이도가 몰아닥치는 미국 오클라호마주를 배경으로 시민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의 전형적인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 정도의 결과물이다. 초기작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규모가 된 제작 스태프를 통솔해 가며 허술함 없는 결과물을 완성했다는 면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지만, '무난한 아는 맛'이라는 것이 정 감독 고유한 특이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첫 작품에서 '한국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정 감독에게 우리 관객이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미나리'에 투사된 그의 다면적인 정체성이 반영된 독특한 세계관일 테다. 비슷한 입장에서 완성돼 에미상을 휩쓸며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큰 지지를 받았던 이성진 감독의 '성난 사람들'이 선례처럼 존재하는 시대에 그리 무모한 기대감만은 아니다. '미나리'로 존재를 각인하고 '트위스터스'로 할리우드에서의 생존을 확실시한 정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 세상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지긋한 시선과 궁리가 담긴 장면들을 발견하게 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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