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대장 김규일이 ‘반미 자주’ 분신 김세진으로

정대하 기자 2024. 8. 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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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동학농민군 열전④ 김규일
김세진 열사의 어머니 김순정씨가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연루됐던 가족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새 세상 꿈꿨던 인품 좋은 부자
농민군 봉기 이끌다 끝내 순국

고손자 서울대생은 “양키 고 홈”
90여년 시차 두고 반외세 투쟁

“우리 세진이야말로 우리 할아버지 자손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지난 19일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만난 김순정(87·김세진의 어머니, 김규일의 증손부)씨는 “그때는 아무 정신도 없어, (일가 한 분이) 우리에게 한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몰랐다”고 말했다. 1986년 4월28일, 김씨는 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가 전신화상을 입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 있던 아들을 봤다. 의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던 순간, 아들은 “죄송합니다.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말한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닷새 뒤 세상을 떴다. 당시 21살이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김씨는 90여년간 밀봉돼 있던 가족사를 알게 됐다.

선대 김응룡은 ‘행주치마 전술’

김세진의 고조부 김규일(1843~1894)은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다. 전라도 무장현 하이면 고산리(현 고창군 상하면 장암리)에서 출생해 성장한 김규일은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손화중(1861~1895)과 교류했다고 한다. 손화중은 정읍 출신이지만, 무장현으로 옮겨 포덕 활동을 했던 대접주였다. 설득력이 뛰어나고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 주변에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전봉준은 고부 봉기 이후 다시 봉기할 장소로 무장을 선택하고 손화중을 설득했다. 무장은 전봉준이 1894년 3월20일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무장포고문’을 발표했던 장소다.

김규일은 동학농민혁명 1·2차 봉기에 모두 참여했다. ‘다시피는 녹두꽃’(1997·역사문제연구소 냄)을 보면, “김규일은 부자이고 기골이 장대하며 인품이 좋았고, 동네에서 김 대장, 동학 대장으로 불렀다”고 한다. 김규일의 증손자이자 김세진의 아버지인 김재훈(1937~2020) 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증조부님이 살던 집을) 일제시대에 헐고 새집을 지을 때 땅을 파니 항아리에 담긴 엽전이 몇 자루나 나왔고, 땅속에서 화살촉도 나왔다고 합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김규일의 집안은 장남이 성균관에 출입할 정도로 양반층에 속했다. 선대 김응룡(1546~1597)은 임진왜란 때 그의 동생과 함께 순국했다. 김응룡은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칠 때 부녀자들까지 치마폭에 돌을 주워 던지는 ‘이른바’ 행주치마 전술의 창안자로 전해지고 있다.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 계산서원 마당엔 ‘임진왜란 행주대첩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은 “김규일은 당시 토반 집안이었지만, 불의한 시대 상황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한 뒤 1894년 4월27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와 협약(전주 화약)이 성립되자 5월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동학농민군은 접주를 군·현 단위의 ‘집강’으로 임명하고 집강소 조직을 통해 스스로 신분 개혁에 나섰다. 동학농민군은 그해 9월 2차 봉기에 나섰다. 2차 봉기엔 해월 최시형이 ‘기포령’(무장봉기 지령)을 내렸다. 동학 남접과 북접이 손을 잡고 전면적인 대일 항전에 나섰다. 손화중은 2차 봉기 때 광주로 나가 나주성을 공격하며 후방을 방어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농민군은 패배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1894년 6월21일)한 뒤, 조·일 공수동맹을 맺고 조선군의 군사지휘권을 빼앗았다.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은 ‘대일본제국 동학당 정토군’이라는 진압부대를 꾸렸다. 조선 정부 진압군이 남긴 ‘양호우선봉일기’에는 김규일의 죽음이 기록돼 있다. “적괴 20명을 1894년 12월12일 체포하여, 그 가운데 김병운(김규일의 별호)은 효수하고 박경석은 물고하고 송진팔 외 18명은 영광군으로 보내어 경중에 따라 처분케 하였다.” 동학농민군 접주였던 김규일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무장관아에서 효수당했는데, 할머니께서 머리를 치마에 받아들고 몰래 나오셨다고 들었어요.”

김씨는 “할머니가 담대하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말 사이에 고개를 숙이고 몰래 들어가 장대에 꽂혔던 그거(머리)를 내렸대요. 몸은 없고 머리만…. 그래서 ‘해골 무덤’이라고 했다고 그랬거든요.” 실제로 1972년 김규일의 무덤을 전북 정읍시 정우면 우산리로 이장할 때 주검은 머리만 나왔다. 김규일이 효수된 뒤 가족들은 어렵사리 목숨을 건져 피신했다. 김씨는 “밤을 도와서 정읍으로 가는데, 임신 중이던 할머니가 한밤중 칠보산에서 출산했다”고 전했다. 김규일의 집안이나 문중에선 ‘동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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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만에 추모비…독립유공자 서훈돼야

1986년 5월 서울 관악구 서울대에서 열린 김세진, 이재호 합동장례식. 한겨레 자료사진

김규일의 고손자인 김세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1965년 2월 충북 충주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세진은 1971년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면서 서울에서 자랐다. 1983년 서울대 자연대 미생물학과에 입학한 김세진은 4학년 때인 1986년 자연대 학생회장을 맡았다. 김세진은 서울대 85학번 대학생 전방 군대 입소 반대투쟁 과정에서 이재호(정치학과 4학년·명예졸업)와 함께 시위를 이끌었다. 이들은 경찰들이 건물 옥상으로 올라오자 미리 준비한 시너를 온몸에 끼얹으며, “반전 반핵 양키 고홈”을 외쳤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려면 ‘반제국주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갑오거사 후 백 주년에 이르러 역사적 재평가와 통한의 신원이 이뤄지게 되었으니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고창군 상하면 장암리 ‘갑오동학의사 김선생 추모비’엔 동학대장 김규일과 ‘아름다운 청년’ 김세진의 삶과 죽음이 기록돼 있었다. 고창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1994년 5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김규일의 생가 마을 들머리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 비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의 집안 전통인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다. 동학대장 김규일과 ‘아름다운 청년’ 김세진은 90여년의 시차를 두고 반외세 투쟁에 나선 셈이다.

하지만 김규일은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세진은 2006년 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사학과)는 “일본은 1894년 5월 히로시마 대본영 체제를 구축하고 청일전쟁 등 모든 전쟁을 지휘했다”며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을 허깨비로 만든 일본이 청나라와 싸울 때 유일하게 일본에 저항했던 동학농민군들을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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