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로큰롤

서울문화사 2024. 8. 2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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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포트와 무더위는 한 몸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걱정 없다. 가히 ‘펜타포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있으니까. 올해 펜타포트는 혼자가 아닌 열입곱 살 조카와 함께했다. 30대와 10대의 시선으로 기록한 펜타포트에서의 72시간.

“내년에도 또 갈 거야?” “응. 진짜 덥고 습하긴 한데, 재밌어.” ‘2024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 때 고등학교 1학년 조카와 나눈 대화다. 조카에게 다양한 음악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던 삼촌으로서 뿌듯했다. 절대 어른의 ‘자뻑’이 아니다. 땀 흘리며 즐기던 녀석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펜타포트가 성황리에 열렸다. 8월 2일부터 4일까지 15만 명이 넘는 관객이 찾았다. 무더위를 뚫고 수많은 사람이 몰린 데는 이유가 있다. 잔나비와 데이식스 등 너른 팬층을 거느린 팀부터 킴 고든과 잭 화이트 등 음악 마니아를 설레게 할 아티스트까지 라인업이 다채롭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과 마니아 모두를 아우르는 것.

펜타포트가 지닌 위상과 상징성이다. 현시점 대한민국 내 유일한 대형 여름 록 페스티벌이기에 유명 밴드를 포함한 여러 아티스트를 섭외할 수 있는 안정성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채로운 라인업을 구성할 수 있는 안목이다. 이는 국내 인디 아티스트 기획 공연부터 해외 아티스트 내한 공연까지 관록이 있는 회사 힙스퀘어(펜타포트의 아티스트 섭외 및 의전 등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 있다) 덕분이다.

하지만 펜타포트엔 단순히 누구를 본다는 행위를 넘어선 마성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지옥 더위를 이길 수 없다. ‘아, 진짜 덥다 내년엔 못 오겠다 이젠 늙어서 힘드네”라면서도 매년 추억 갱신과 도파민 충전으로 다시금 오게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마조히즘스러운 경험이랄까. 지난 7일이 입추였다. 아직 가을의 서늘한 고독은 이르지만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다. 갑작스레 여름이 가기 전, 이번 8월을 그리워할 만한 펜타포트의 순간을 기록하고자 한다. 조카와 함께 다니며 나눈 대화에 기반했다. 그렇기에 아티스트의 신상 정보보다는 음악을 접했을 때의 인상을 담은 글이다. 일자별로 인상 깊었던 아티스트의 공연 후기를 남긴다.

8월 2일 금요일

첫째 날

턴스타일

살다 살다 이런 일이. 첫날 헤드라이너인 하드코어 펑크 밴드 턴스타일의 무대를 보고 입이 벌어졌다. 팝의 감각을 더한 RATM(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스타일의 음악을 구사하는데 멤버 모두 외모가 출중했다. 당연히 열기가 올라갈 수 밖에 없는 상황. 슬램존에서는 열기가 승화한 구름(일명 ‘파오운’)이 보일 정도였다. 공연 막바지였다. 프런트맨이 수많은 관객을 무대 위로 소환했다. 순식간에 수백 명이 무대에 올라가 모쉬 핏을 펼쳤다. 소규모 하드코어 펑크 공연에서 보던 풍경이 대규모 록 페스티벌의 광경이 된 순간이었다. 이런 역사가 쌓여서 밴드 붐이 다시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조카와 내가 뽑은 2024 펜타포트의 최고 장면이었다.

킴 고든

고고한 품격을 보여준 킴 고든. 그가 누구인가. 소닉 유스의 주축 멤버였으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최전방의 음악을 들려주는 기수다. 몇몇 거장이 트렌드를 좇다가 이도저도 아닌 작품을 낼 때. 누구누구는 스스로 ‘핫걸 호소인’이 됐을 때. 킴 고든은 이 모두를 정리했다. 셀린느 반바지를 입고 무심히 트랩 비트를 타는 킴 고든은 그 누구보다 섹시했다. 분명 무대를 본 모든 이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열일곱 조카는 재차 물었다. “1953년생이라고?”

8월 3일 토요일

둘째 날

잭 화이트

21세기 로큰롤 영웅 잭 화이트. 디지털 요소를 모두 거세한 아날로그의 마력을 보여줬다. 요새 흔히 쓰는 MTR은 한 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아날로그 장비와 이를 다루는 로큰롤 밴드만이 있었다. 무대를 보며 미국 드라마 <프릭스 앤 긱스>의 한 대사가 생각났다. “로큰롤은 머리에서 나온 게 아냐. 바짓가랑이에서 나왔다고.” 그래, 맞다. 로큰롤 공연 음향은, 그러니까 ‘존나 굵직하고 커야 한다’. 이번 잭 화이트 라이브가 그랬다. 조카는 잭 화이트의 공연을 보고 바로 ‘입덕’했다. 자기 아빠에게도 마구 영업했을 정도니···.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 바로 슬램. 슬램이 밈이 된 듯했다. 곡의 기승전결 상관없이 ‘막슬램’을 해대니 무대 집중도가 떨어졌다. 사실 잭 화이트 공연뿐만 아니라, 이번 펜타포트의 전반적인 광경이 그랬다. 공허한 외침과 몸부림.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크 미러 오브 트레지디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 무더운 여름의 열기를 서늘하게 식혀주는 명작. 더위는 물론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을 선사했다. 아울러 선포의 장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음악을 하는 팀이 있다고. 그리고 심포닉 블랙 메탈이란 장르가 충분히 매력 있다고.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보컬리스트가 말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이내 조카가 놀라서 말했다. “와, 한국 밴드였어?”

파란노을

지금까지도 계속 곱씹는 무대다. 많은 지인은 최고의 무대로 손꼽기도 했다. 관객 몇몇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도 했으며, 자신도 본받아 펜타포트에 서고야 말겠다고 했다. 파란노을은 <피치포크> 등 해외 유명 매체에서 극찬을 받은 슈게이징 아티스트다. 현시점 청춘의 상처를 달래주는 대표인이기도 하다. 그의 가사를 보자. “찐따 무직 백수 모쏠 아싸 병신 새끼 / 사회부적응 골방 외톨이 / 누구보다 간절했었어. 무대에도 서고 싶었어. 록스타가 되고 싶었어.(노래 ‘청춘 반란’의 가사 중)”

대중은 방구석 히키코모리가 펜타포트에 선 모습에 모두 열광했다. 보면대 뒤에 숨어서 노래하던 인물이 무대 앞으로 나온 것에 감격했다. 단전까지 용기를 끌어올린 그의 무대가 자꾸만 생각난다. 그리고 한동안 파란노을의 음악을 찾아 들을 것만 같다. 생각해보니 조카와 공연을 보던 그날의 하늘은 참으로 파랬다.

8월 4일 일요일

셋째 날

세풀투라

일요일의 서브 헤드라이너 세풀투라. 시대를 풍미했던 메탈 밴드가 고별 순회 공연 중 인천에 들렀다. 은퇴를 앞둔 밴드인지라 긴가민가하기도 했다. 혹시 힘이 다 빠진 건 아닐까. 기우였다. 현역 그 이상이었다. 일본 만화 <원피스>의 흰 수염이 정상 결전에서 혈혈단신으로 적들을 도륙하는 듯한 퍼포먼스랄까. 어찌나 대단한지 보는 내내 턱이 빠질 정도였다. 평소에 메탈 음악을 즐기지 않던 지인 모두 열심히 머리를 흔들어댔다. 환호에 부응하듯 세풀투라는 40년의 엑기스를 담은 공연을 펼쳤다. 조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같은 감탄사를 반복할 뿐이었다. “와, 우와··· 우와···.”

녹황색사회

축제의 묘미는 관객과 함께하는 호흡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밴드 녹황색사회 무대는 최고였다. 철저하게 공부해 온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단순히 “안녕하세요” 등의 인사말이 아니라 유창하면서 상냥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모든 곡마다 한국어 가사를 화면에 보여줬다. 그 노력에 출중한 라이브와 비주얼까지 더하니 모든 노래가 눈과 귀에 여과 없이 들어왔다.

그렇기에 당일 같은 무대에 선 데이식스의 무대는 아쉬웠다. 안정적인 연주와 멘트 그리고 매끄러운 진행. 그뿐이었다. 일반 음악 방송 무대 같았다. 마치 벽을 치고 펜타포트 관객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조카도 같은 의견이었다. “생각보다 밋밋하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원필 목 상태가 별로인 거 같아.” 체력의 한계로 놓쳤던 무대가 아쉽다. 미역수염, 추다혜차지스, 한로로와 지소쿠리 클럽 등 이른 시간 무대에 선 이들. 무더위를 피하고자 오후 서너 시가 돼서야 펜타포트 현장에 출석해서 볼 수 없었다. 내년이면 펜타포트가 20주년을 맞는다. 늘 그랬듯 다채로운 아티스트가 올 것이다. 최대한 많은 무대를 보기 위해 2025년엔 무더위 정책을 조금 더 마련해주면 좋겠다. 대형 아티스트는 늦은 시간에 공연하지만, 신인 아티스트는 땡볕이 작열하는 시간에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펜타포트에 갈 것이다. 2025년에도 조카와 무대를 보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내년에도 또 갈 거야?” “응. 작년보단 쾌적해서 좋네, 역시 재밌어.”

Editor : 주현욱 | Words : 류진석 | Photography : P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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