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포의 아이들’ 외나무 다리서 만나

정병선 기자 2024. 8. 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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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환-김기동, 선수 시절 단짝 미드필더에서 감독돼 적장으로
니폼니시 축구의 핵심 애제자들 상대에 칼 겨눈다

‘니포(니폼니시)의 아이들’ 윤정환과 김기동이 상암벌에서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제 선수 시절 동료가 아닌 적장 감독으로 만나 상대에게 비수를 꽂아야 하는 운명이다.

프로축구 K리그 윤정환(강원FC)과 김기동(FC서울) 감독이 24일 오후 7시30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상대를 제물 삼아 5연승을 노린다. 15승5무7패(승점 50)로 1위를 질주 중인 강원과, 12승6무9패(승점 42)로 선두권을 바짝 추격하는 6위 서울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윤 감독과 김 감독은 니포(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의 애칭)의 애제자였다. 러시아 출신 니폼니시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유공(부천 SK, 현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이었다. 니폼니시 감독은 한국 지도자로 나서면서 축구 전술은 물론 선수 개성, 인성, 축구단 관리, 친화적인 언론관까지 축구판의 전체 규율을 설정한 진정한 지도자였다.

올 시즌 프로축구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강원FC의 핵심을 이루는 윤정환(오른쪽) 감독과 양민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정병선 기자

그가 한국 축구에 도입한 디테일한 전술은 그야말로 프로축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한국 축구에서 좀처럼 중용되기 어려운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변화시키며 축구판의 혁명을 불러온 존재였다. 당시 수원 삼성 지도자였던 차범근 감독도 부천과의 경기 때마다 니폼니시와 대화하며 그의 전술 축구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러시아 출신 니폼니시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무질서한 카메룬 선수들을 다 잡아 아프리카 팀 최초로 월드컵 8강 신화를 쓴 주인공이다. 당시 그를 눈여겨본 이계원 부천 SK단장이 모스크바로 날아가 전격 영입했다.

니폼니시 감독은 국내 프로축구의 병처럼 유행한 뻥 축구를 극도로 혐오했다. 대신 패스 위주로 상대 진영을 돌파하는 전술 위주로 미드필더의 역할을 가장 중시했다. 그때 미드필더로 중용된 선수가 윤정환과 김기동이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선 윤정환은 정교한 스루패스로 상대 수비를 무력화했다. 김기동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서 상대 공격을 막아내며 윤정환과 환상 호흡을 맞췄다.

FC서울과 인천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열린 지난 3월1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린가드가 교체 투입 전 김기동(왼쪽)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재만 스포츠조선기자

세월이 흘러 윤정환과 김기동이 상암 월드컵 구장에서 감독으로 대결을 펼친다.

윤정환 감독은 1995년 제주 유나이티드의 전신인 유공(부천 SK)에서 프로 데뷔했다. 1990년대 후반 엄청난 축구 감각을 바탕으로 상대 허를 찌르는 패스로 축구팬을 매료시키며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이자 한국 축구 최고 테크니션으로 손꼽혔다. 타고난 패스 감각, 넓은 시야, 영리한 경기 운영은 천재적이었다.

김 감독은 40세까지 현역 생활을 한 프로 축구의 역사요, 노력형 축구 천재다. K리그 통산 총 501경기에 출전하면서 역대 필드 플레이어 최다 출전 2위에 오르며 프로축구의 철인으로 불렸다. 그는 훗날 박지성을 연상시키는 플레이 메이커였다. 부지런한데다 90분 내 쉬지 않고 경기장 곳곳을 누비는 선수였다. 니폼니시 감독도 “체력을 생각하라”고 말할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았다.

강원FC 윤정환 감독. /한국프로축구연맹

지도자가 된 윤 감독와 김 감독 모두 니폼니시 감독을 축구 은인이자 감독의 롤모델로 생각한다.

윤 감독은 “제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해 주신 분이 니폼니시 감독이었다”며 “저를 중심으로 팀 전술을 펼쳤던 지도자”라고 말했다. 그는 “저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다는 게 좋은 것이라기보다 감독이 ‘축구를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분이다”고 했다.

김 감독도 평소 “니폼니시 감독을 만나 축구에 눈을 떴고 생각하는 축구를 하게 됐다”고 말한다.

윤 감독은 2008년 일본 프로축구 J리그 사간도스의 수석코치를 시작으로 2010년 감독대행, 그다음 해 감독에 부임했다. 2부팀 사간도스를 1부 리그에 올리며 ‘사간도스의 영웅’으로 불렸다. 2014년 12월 울산 현대 감독을 맡아 2시즌을 치른 뒤 2017년 세레소 오사카 감독에 부임하자마자 첫 시즌 일왕배와 르뱅컵 우승을 차지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세레소 오사카 창단 사상 첫 타이틀이었다. 이후 무앙통 유나이티드(2019), 제프 유나이티드(2019~2022)에서 지도자 생활을 지냈다. 어느덧 지도자 15년째를 맞았다.

김 감독은 2019년 시즌 중 최순호 감독 뒤를 이어 포항을 지휘봉을 잡았다. 평소 지도자 준비를 해왔던 김 감독은 시즌 중 갑자기 팀을 맡았음에도 포항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4위로 마쳤다. 2020년 엔 성적을 3위로 한 단계 올리며 지도자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해 김 감독은 K리그 사상 첫 우승팀이 아닌 3위 팀 감독으로 감독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FC서울 김기동 감독. /한국프로축구연맹

두 감독은 선수로서나 감독으로 성공한 배경에 니폼니시 축구철학을 내세운다.

윤정환 감독은 지난 2월 튀르키예 안탈리아 동계훈련 때 훈련장을 찾은 니폼니시 감독이 “러시아 프로팀 제니트와의 연습 경기를 보고 양민혁을 한눈에 알아봤다”며 “축구 감각이 탁월한데 앞으로 크게 될 선수니 잘 지도해라”고 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니폼니시 감독이 윤정환을 처음 봤을 때처럼 윤 감독이 18세 양민혁을 보는 안목이 접점을 이루는 대목이다.

김 감독도 포항을 떠나 FC서울 감독을 맡은 뒤 심리적 부담감을 떨치고 서서히 자신의 축구 색을 입혀가는 분위기다.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신 제시 린가드와도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며 팀에 녹아나도록 하는 등 강한 지도력으로 팀을 상승세로 이끌고 있다.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 /한국프로축구연맹

강원 FC와 FC서울의 경기는 두 감독의 지략 대결에다 팀 내 상징인 린가드와 양민혁의 대결이 어우러진데다 강원의 우승과 서울의 상위권 진출 길목에서 맞물려 올 K리그 가장 뜨거운 한판 대결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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