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폭력 네 이놈, 고귀한 ‘수소’를 욕보이지 말라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김명희 2024. 8. 24.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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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농도 산의 위험한 속성을 이용하여 ‘산 테러(acid attack)’라는 치명적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젠더폭력’에서 그 빈도가 잦다. 세계적으로 산 테러 피해자의 80%는 여성이다.
2017년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파키스탄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한 ‘산 테러’ 생존자들. ⓒAP Photo

수소는 주기율표 1번 원소다. 주기율표는 발견 순서나 가치(?)에 따라 번호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질량과 구조 특성에 따라 행과 열을 배정하고 번호를 부여한다. 대체로 질량이 무거울수록 뒤 번호를 받는다. 수소는 지금까지 발견된 118개 원소 중 가장 가볍기 때문에 1번이지만, 역사와 가치를 따져보아도 1번의 자격이 있다. 수소는 세상,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첫 번째 원소다. 138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난 첫 1초에 탄생했다. 당시에는 온전한 원소가 아니라 수소 핵에 해당하는 양성자였고, 약 37만 년이 지나 전자가 양성자와 결합할 만큼 우주가 식으면서 비로소 수소 원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로, 모든 물질 질량의 7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소는 태양을 존재하게 만드는 동력이자 지구를 먹여 살리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태양에서 수소 원자핵끼리 융합이 일어나 중수소(2H)와 삼중수소(3H) 그리고 헬륨이 생성되는데, 이때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태양은 수소폭탄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발전소라 말할 수 있다. 이 에너지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말 그대로 먹여 살린다. 이뿐만 아니라 수소 자체가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원소다.

기체 상태의 수소 분자(H2)는 맛, 냄새, 색깔이 없고 불이 잘 붙는다. 18세기 금속에 산(acid)을 투여할 때 발생하는 기체를 태웠더니 물이 되는 것을 발견하면서 수소의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물(hydro)을 만든다는(gen) 뜻의 그리스어를 따와서 수소(hydrogen)라는 이름을 지었다. 실험이 너무 해보고 싶어서 친구와 함께 대학 실험실에 몰래 들어간 중학생 프리모 레비를 혼비백산하게 만든 것도 수소였다. 물을 전기분해하여 나온 기체가 수소라는 것을 친구에게 증명하기 위해 불을 붙였다가 유리병이 폭발했던 것이다. 중학생이 참외밭 서리가 아니라 화학실험 서리를 하다니, 과연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2년 부산국제모터쇼에 전시된 수소 버스. 수소는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다. ⓒ연합뉴스

수소의 산업적 활용도 활발하다. 가볍고 불에 잘 타는 속성을 이용하여 1806년에 연료 엔진이, 1823년에 가스등이 개발되었다. 1852년에는 비행선이 개발되면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교통편으로 널리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비행선 ‘힌덴부르크’가 뉴욕 상공에서 폭발하며 비행선 연료는 점차 불연성 헬륨으로 대체되었다. 원래 헬륨용으로 설계된 비행선에 수소를 주입했다가 배관의 손상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는 점에서, 수소 입장에서는 좀 억울했을 법도 하다. 오늘날 기상 비행선에는 여전히 수소가 사용되고 있다.

‘산 테러’ 범행 동기 분석해보니

이뿐만 아니라 정유화학 산업에서는 수소첨가 분해 공정을 통해 디젤과 윤활유 같은 제품을 만들어낸다. 인류를 식량난에서 구원한 암모니아 생산공정, 일명 ‘하버-보슈 과정’에도 수소가 필수다. 최근에는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다. 연료전지에서 산소와 반응시켜 전기에너지를 얻거나, 수소 자체를 연소시켜 구동력을 얻게 된다. 국내에도 수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트럭과 버스가 이미 출시되어 운행 중이다. 수소 자동차의 배기가스는 수증기밖에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장점이다.

수소가 활약하는 또 다른 분야는 산-염기 반응이다. 수소는 전자를 방출하는 성격 때문에 양이온(H+)이 되기 쉬우며, 수소이온 농도가 높을수록 산성이 강해진다. 산-염기의 정도를 나타내는 pH는 수소이온의 농도를 말하는데, 숫자가 작아질수록 강산성을 의미한다. 우리 몸 혹은 일상생활에 다양한 종류의 산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빈속에 속쓰림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사실 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산은 염산(HCl)이 주성분이며 pH2 정도로 강력하다. 식초에는 아세트산, 과일에는 시트르산, 콜라에는 탄산이 들어 있고, 만병통치약 아스피린의 성분은 아세틸살리실산, 비타민C는 아스코르빈산이다. 무엇보다 생명의 근본인 DNA와 RNA 또한 핵산(neucleic acid)이다.

산은 산업공정에서도 많이 쓰이는데 고농도 산은 매우 위험한 물질이라 대단히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피부가 고농도 산에 노출되면 단백질 변성과 화학적 화상이 일어난다. 심각한 노출 시 피부층을 지나 근육과 조직, 심지어 뼈까지 손상시키며,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바로 이렇게 위험한 속성을 이용하여 ‘산 테러(acid attack)’라는 치명적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젠더폭력’에서 그 빈도가 잦다. 세계적으로 산 테러 피해자의 80%는 여성이다. 가해자는 거의 남성이다.

산 테러는 황산이나 질산, 염산 같은 강산 용액을 타인에게 투척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희생자의 사진을 한 번만 보면 이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악의적인 범죄인지 알 수 있다. 공격은 주로 얼굴 부위에 가해지는데 말 그대로 피부·뼈·살이 녹아내리면서 견딜 수 없는 통증을 유발하고, 심각한 장애를 남긴다. 눈이나 귀 부위에 노출되면 실명, 청각 손실이 일어난다. 코의 연골이 파괴되어 콧구멍이 완전히 막히기도 하고, 입술이 파괴되거나 변형되어 말을 못하고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심한 외모 변형과 장애 때문에 학업이나 일을 하기 어렵고 치료 비용도 막대하기 때문에 경제적 곤경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장애가 남지 않더라도 공격을 받은 경험 자체가 일상에 대한 공포,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젠더폭력’에서 산 테러가 주로 얼굴 부위를 표적으로 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피해자를 살해하려는 동기보다는 (죽이는 것이 목표라면 더 확실한 방법들이 많이 있다) 여성 피해자의 외모를 망가뜨려서 향후 연애, 직업적 전망, 재정적 안정성, 사회적 지위를 망치는 것이 목표다. 산 테러 사례의 동기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사랑 고백이나 청혼이 거절당한 것, 여성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 것, 심지어 여성이 자신보다 성공한 것도 공격의 사유였다. 여성의 ‘노(No)’를 견딜 수 없고 여성이 자신보다 잘난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병약하고 비뚤어진 에고가 ‘여성에게는 외모가 유일한 자산’이라는 망상과 만났을 때, 여성의 인생을 망치는 수단으로 산을 투척하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남성의 의지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기도 하다.

산 테러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결혼지참금, 명예살인 등의 악습이 남아 있는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를 다루기 위한 법률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하지만 결코 이들 국가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영국·미국·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여성에 대한 산 테러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영국은 2017년 산 테러 941건이 보고된 이래 꾸준히 감소하다가 2022년에 다시 710건으로 늘어났고 처음으로 여성 피해자 수가 더 많아졌다. 그동안 영국에서의 산 테러 범죄는 주로 마약 거래, 범죄 조직 간 충돌 같은 남성 대 남성의 거리 폭력 상황에서 일어났는데, 최근 그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한국은 공식 통계조차 없어

여성 역무원이 살해된 서울 신당역 출구 앞 추모 공간에 2022년 9월17일 한 시민이 헌화하고 있다. ⓒ시사IN 포토

전통적 가부장주의가 약화되고 여성 인권이 증진되면 젠더폭력 문제도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전 세계가 젠더폭력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7월 영국 정부는 젠더폭력이 ‘유행병(epidemic)’ 수준에 이르렀다며 “이를 국가적 긴급(national emergency) 상황으로 다룰 것”이라고 발표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매년 연간 200만명, 여성 12명 중 최소 한 명이 젠더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경찰에 보고되는데, 실제 숫자는 그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2년 4월에서 2023년 3월 사이에 ‘매일’ 2959건의 젠더폭력 관련 범죄가 보고되었고, 이는 경찰이 집계한 전체 범죄의 20%를 차지할 정도였다. 젠더폭력은 치명적 결과로 이어지기 쉬운데, 살인사건 6건 중 하나가 가정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지난 5년 동안 젠더폭력 관련 범죄는 37% 증가했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연령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예컨대 아동 대상 성착취는 2013~2022년에 400% 증가했고, 아동이 가해자인 범죄도 55.6% 늘었다.

영국 치안 당국이 발표한 이 보고서는 여성혐오적 인플루언서들에 의해 남성과 소년들이 영향을 받아 극단주의로 변해가는 현상에 대해 경찰이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테크기업이 소년들을 표적으로 하는 유독한 여성혐오적 콘텐츠 노출을 멈추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그루밍·성학대가 번창하는 것을 막는 안전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만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가디언〉은 영국 사회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젠더폭력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죽은 여성 카운팅: 페미사이드 센서스와 살해된 여성들(Counting Dead Women, The Femicide Census and Killed Women)’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남성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모든 여성들의 사례를 아카이빙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사회는 2012년부터 ‘죽은 여성 카운팅(Counting Dead Women)’ 프로젝트를 통해 페미사이드 사례들을 아카이빙하며 개선을 촉구해왔다. 이곳 집계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 작년에만 여성 64명이 살해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젠더폭력을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고 지난 5월, ‘남성의 행동을 개선하기 위한’ 특임장관을 임명했다. 젠더 스테레오타입을 변화시키고 존중이 담긴 관계를 보여주는 롤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젠더폭력과 페미사이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2022년 유엔 여성기구와 유엔 마약범죄사무소는 ‘페미사이드 통계 수집을 위한 국제통계 프레임워크’ 도입을 결정했다. 이는 페미사이드를 식별하고, 국가 간에 비교 가능한 통계를 산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의도적 살인 △가족 구성원에 의한 살인(명예살인 등) △성차별적 동기가 나타나는 가해자에 의한 살인 중 하나에 해당하면 페미사이드로 규정된다.

2024년 3월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2022년 페미사이드로 희생된 여성 133명을 추모하는 아트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AP Photo

국내에서도 그동안 시민사회와 많은 전문가들이 젠더폭력에 대한 공식 통계를 산출하고 성차별·여성혐오와 관련된 범죄를 식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정부는 가해자 입으로 ‘여자라서’ 때리고 죽였다고 밝힌 사건들마저도 혐오범죄임을 부인하고 ‘묻지마 살인’ ‘이상동기 범죄’ 같은 애매한 명칭을 사용해왔다. 공식 통계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 여성의전화’는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들을 분석하여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2023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를 표했다. 이 보고서 집계에 따르면 2023년에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8명으로 추정된다. 살해 위협과 살인미수까지 포함하면 568명이다.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오스트레일리아의 페미사이드 규모와 비슷하지만, 품격 있는 한국 사회는 오스트레일리아처럼 ‘국가적 위기’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이 보고서가 밝힌 여성 살해의 가장 흔한(23.2%) 범행 동기는 피해 여성이 이혼·결별을 요구하거나 가해자와의 재결합·만남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인도의 산 테러에서,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페미사이드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되는 현상이다.

여성의 주체적 선택과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네가 감히!’ 이데올로기, 즉 여성혐오(misogyny)는 지구촌 곳곳에서 강산(强酸)만큼이나 독성을 발휘하고 있다. 아,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138억 년 동안 밤하늘을 별빛으로 밝히고 태양을 불타오르게 해서 지구의 생명을 지탱해온 수소에게 크나큰 실례가 아닌가. 이토록 고귀한 원소를 다른 인간의 인생을 망치겠다는 못난 짓에 쓰는 것은 수소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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