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보다 엘리트 스포츠 지원을 더 많이 한다고? [경기장의 안과 밖]
2024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금메달 5개’를 목표로 삼았다. 보수적 전망이었다. 위기감의 발로였다. 한국 선수단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종합 16위에 그쳤다. 금메달 여섯 개와 전체 메달 20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최소였다. 이번 대회에서 선수단의 선전은 기대 이상이었다. 대회 9일 차에 이미 금메달 10개로 목표를 두 배나 초과 달성했다.
하지만 한국 ‘엘리트 스포츠’계에는 여전히 위기감이 팽배하다. 여자 핸드볼을 제외한 단체 구기종목이 모두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는 점이 잘 보여준다. 오랫동안 라이벌로 여겨온 일본은 단체 구기 전 종목에 출전했다.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한국과 기량 차이가 확연했다. 일본 남자농구 대표팀은 미국프로농구(NBA) 슈퍼스타 뤼디 고베르와 빅토르 웸반야마가 버틴 프랑스를 거의 이길 뻔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성공을 한국 엘리트 스포츠인들이 자주 거론한다. ‘일본은 엘리트 스포츠를 지원해서 성공을 거뒀는데, 한국은 거꾸로 죽이고 있다’는 맥락에서다.
한국 정부의 스포츠 정책은 국가주의식 엘리트 스포츠 지원에서 생활체육과 스포츠기본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1962년 제정된 국민체육진흥법은 2020년까지 제1조에 “체육을 통하여 국위 선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했다. 반면 2021년 제정된 스포츠기본법 제1조에는 ‘스포츠에 관한 국민의 권리’와 ‘모든 국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라는 문구가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엘리트 스포츠계에는 일종의 ‘박탈감’을 느끼는 이가 적지 않다. 그래서 일본 정부의 엘리트 스포츠 지원을 강조한다.
일본은 2011년 스포츠진흥법을 전면 개정해 스포츠기본법을 제정했다. 엘리트 스포츠 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게 특징이다. 이 법 제25조는 “국가가 우수한 스포츠 선수를 확보·육성”하기 위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제27조는 국제경기대회 유치 지원, 제28조는 기업·대학 등 스포츠 팀 지원을 다룬다. 스포츠진흥법에는 없던 ‘스포츠 입국’이라는 개념도 새로 등장했다. 법 제정 이전부터 일본 정부는 2020 하계올림픽 유치 경쟁을 하고 있었다. 2004 아네테 올림픽에서 금메달 16개를 땄지만 다음 베이징 올림픽에선 9개에 그쳤다. 자국에서 개최할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2015년에는 문부과학성 산하 스포츠청소년국을 스포츠청으로 승격시켜 담당 부서로 했다. 효과는 극적이었다. 일본은 2012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 7개에 그쳤다. 하지만 다음 리우 대회에서 12개였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최가 1년 늦춰진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선 27개를 따냈다. 홈 어드밴티지를 고려하더라도 대단한 성취였다. 한국은 리우에서 일본에 금메달 3개 차로 뒤졌고, 도쿄에선 21개 차이가 났다. 이 시기를 전후해 한국에서도 일본 정부의 엘리트 스포츠 지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스포츠청은 엘리트 체육만 전담하지 않는다. 2022~2024년 스포츠청 예산안 규모는 연평균 3500억원 정도였다. 전체 예산에서 엘리트 스포츠 관련 금액은 약 1500억원으로 비중은 40%대 초반이다. 2022년 예산안 기준으로 엘리트 선수 기량과 관계된 ‘경쟁력 강화사업’이 약 1000억원으로 가장 덩치가 컸다. 여기에 국가훈련센터 종목별 기능 강화, 반(反)도핑 활동, 경기단체 지원, 첨단 의과학 연구 추진 등에 약 190억원이 편성됐다. ‘생활체육’으로 분류할 수 있는 항목은 전체 예산의 60%가량으로 더 비중이 컸다. 학교 운동장, 체육관을 포함한 시설 정비, 운동부 활동 개혁, 스포츠 참여 인구 확대, 장애인 스포츠 지원, 여성 선수 육성과 지원, 유아기 운동습관 형성 등에 2000억원가량이 편성됐다.
지원 방식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스포츠 명문 쓰쿠바대 조교수를 거쳐 서울여대 스포츠운동과학과에 재직 중인 홍성찬 교수는 “초기에는 재정지원 대부분이 단일 목적 사업이었다. 지금은 여러 효과를 기대하는 지원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예를 들면 경기력 향상을 위해 대학에 장비 연구 지원을 하고 이를 지역 스포츠 용품 업체와 매칭해 지역 경제 활성화도 노리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의 성공 사례는 한국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정부가 2010년대 이후 실시하고 있는 정책을 한국은 더 오래, 더 대규모로 이미 해왔다.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 정부의 엘리트 스포츠 지원 규모는 작지 않다. 오히려 훨씬 크다. 체육 재정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 나뉜다. 전문체육 지원 예산은 중앙과 지방이 대략 4대 6 비율이다. 중앙정부 재정의 체육진흥기금에서 나가는 전문체육 지원금이 일본 스포츠청 엘리트 스포츠 지원 예산과 비견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11월 발간한 〈체육백서〉에 따르면, 2022년 전문체육 지원액은 4019억원이었다. 2013년 1323억원 규모였지만 2015년부터 3000억~4000억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스포츠청 엘리트 스포츠 예산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국가 간 예산 기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유의미한 차이다. 이 금액은 역시 엘리트 스포츠 관련으로 볼 수 있는 ‘국제체육’ 항목을 제외한 것이다. 지난해 ‘국제체육’ 지원에 들어간 금액은 887억원이었다. 2013년부터 평창올림픽 전해인 2017년까지는 매년 3000억원이 넘었다.
일본은 스포츠진흥복권(토토) 수입을 바탕으로 2009년 아지노모토 내셔널트레이닝센터를 건립했다. 이 센터는 일본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한국은 훨씬 앞선 1966년에 유사한 시설인 태릉선수촌을 개촌했고, 2017년엔 진천선수촌으로 이전했다. 질적 향상과 효율적인 예산 집행이라는 과제는 있지만 이 분야에선 한국의 뿌리가 더 깊다.
한국, 생활체육 저변 자체가 좁아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 법령 체계는 유사하다. 윤상진 일본체대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의 체육진흥법은 1961년 일본 의회가 제정한 스포츠진흥법을 사실상 모방했다. 일본 역시 독일의 유사 법률을 모방했다. 그럼에도 차이는 있다. 체육진흥법은 제1조에 ‘국위 선양’이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등 스포츠 애국주의와 엘리트 스포츠 위주 정책이라는 성격이 뚜렷했다. 일본은 2011년 스포츠기본법으로 기존 스포츠진흥법을 대체하면서 뒤늦게 국가주의적 성격을 입혔다. 반면 2021년 제정된 한국의 스포츠기본법은 과거 국가체육에서 벗어나 국민 개개인이 스포츠를 즐길 권리를 중시한다.
하지만 생활체육과 엘리트 스포츠는 대립 관계가 아니다. 탁월한 스포츠 스타의 등장은 더 많은 국민이 스포츠를 즐기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뒤 전국에 불어닥친 탁구 붐이 그 예다. 여전히 올림픽 메달에 기뻐하는 국민도 많다.
일본은 스포츠기본법과 스포츠청 신설 이후 생활체육과 엘리트 스포츠가 나란히 발전하고 있다. 홍 교수는 “워낙 넓은 스포츠 저변에 정부 지원이 더해지니 효과가 컸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은 생활체육 저변 자체가 좁다. 뿌리가 약하니 정부 지원이라는 비료를 과다 투입해도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과거 국가주의 엘리트 스포츠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는 엘리트 체육인들의 반발을 부르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학생 선수 출석 인정 일수가 늘어난 건 반발 여론이 반영된 결과다. 학습권 강화를 위해 학생 선수에게 적용하기로 한 최저학력제는 올해 3월 시행 예정이었지만 9월로 늦춰졌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생활체육으로의 전환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생기고, 정책 디테일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엘리트 스포츠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기 어렵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한 명의 성공한 선수가 등장하기 위해 99명이 희생해야 하는 기존 시스템은 유지될 수 없다. 무엇보다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다.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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