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로’, 디지털 세상에서 누리는 추억? 아니 취향이야 [ESC]

한겨레 2024. 8. 24. 08: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커버스토리] ‘뉴트로’의 즐거움
지난 6월 일본에서 뉴진스의 하니가 ‘푸른 산호초’를 부르는 모습. 어도어 제공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 진공관 앰프, LP…뉴트로 문화 유행
하니 ‘푸른 산호초’, 영화 ‘퍼펙트 데이즈’ 계기 복고 열기 재조명
“기다림의 설렘” “일상 속 힐링” “디자인 매력” “만질 수 있는 물성”

“몰라서 더 재밌고 흥미로워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즐거움이 커요.” 필름 카메라와 로모 카메라(필름 특유의 느낌과 사진 주변부가 어둡게 나오는 ‘비녜팅’ 효과를 낼 수 있는 카메라 브랜드)를 즐겨 사용하는 회사원 김한솔(34)씨의 말이다. 스마트폰으로 언제든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김씨가 굳이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기다림과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다.

필름 카메라는 24~36장의 필름 한 롤을 꽉 채워 찍어야 인화를 할 수 있다. 한 필름을 다 채워 사진을 찍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실제 사진이 나오는 데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꽤 길다. 김씨에겐 평균 한달 안팎의 기간이 걸린다. 요즘엔 인화를 할 수 있는 곳도 드물어서, 찾아가는 시간도 꽤 걸린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김씨는 동네 사진관을 전전하다 지금은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사진관을 고정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인쇄소와 디자인 스튜디오가 포진해 있는 충무로는 사진관이 없어질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적고 운영 시간도 비교적 길기 때문이다.

회사원 김한솔씨가 사용하고 있는 로모 카메라와 필름. 김한솔 제공

김씨는 “이런 과정이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는 사진의 장점은 결과물을 바로바로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는 데에 있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는 경우 내가 찍은 사진을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없잖아요. 오히려 예상 밖의 좋은 사진을 ‘건질’ 때도 있고요. 반대로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만요.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를 기대하는 그 한달가량의 기간을 기대에 차서 기다리는 설렘이 있어요.” 필름 카메라를 거친 세대라면 선뜻 다가오지 않는 말일 수도 있지만,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대세인 젊은 세대에게 복고 아이템인 ‘필카’는 새로운 하나의 문화다.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처럼

최근 뉴진스 멤버 하니와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계기로 복고 열풍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하니가 지난 6월 일본 도쿄돔에서 부른 ‘푸른 산호초’는 옛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신선하다는 평을 동시에 듣는 ‘레전드 퍼포먼스’를 펼쳤다. 1980년 일본의 국민 아이돌 마쓰다 세이코가 부른 곡을 리메이크해 불렀는데, 노래·춤·의상 등이 그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현재의 감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몰이를 한 이유다. 유튜브 쇼츠 등에서 하니의 춤을 커버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오는 등 과거를 새로운 유행으로 만들었다.

또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누적 관객 수 11만명을 동원해 올해 개봉한 독립·예술 영화 중 3위를 기록하며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개인의 담담한 일상을 그린,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내용이지만 이 영화의 인기에 한몫하는 것은 사운드트랙과 주인공이 즐겨 듣는 카세트테이프다. 요즘은 찾아보기도 힘든 카세트테이프를 모으며 즐겨 듣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주인공의 모습은 옛날이라면 당연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낯설고 새롭기까지 하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티캐스트 제공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다.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 엘피(LP) 등 한 시대를 휩쓸고 이젠 흘러간 물이 된 물건들을 젊은 세대들은 신문물로 즐기고 있다.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retro)에 새롭다는 의미의 ‘뉴’(new)를 합친 ‘뉴트로’(newtro). ‘뉴트로 패션’, ‘뉴트로 음악’, ‘뉴트로 디자인’ 등, 검색창에 뉴트로라는 단어를 넣으면 각종 용어들이 등장할 만큼 최근의 트렌드이자, 젊은층의 관심사다. 레트로가 중·장년층의 추억 향유의 문화라면, 뉴트로는 젊은층이 접해보지 못했던 예전 문화를 신선하게 느끼고 재해석하며 유행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소장은 “레트로 열풍이 과거에 유행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리메이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면, 최근에는 물성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 소비 중심으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짚었다. 노 소장은 이어 “데이비드 색스가 2016년 출간한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말한 것처럼 디지털이 소비자의 만족도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레트로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도 꾸준히 존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필카’를 즐기는 김한솔씨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이 매일 찰나의 순간을 같은 앵글로 촬영하고, 인화를 기다리고, 성공 사진과 실패 사진을 고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필름 카메라 사진 찍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필름 인화를 위해 사진관을 찾는 젊은층의 수도 늘었다고 한다. “한창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게 대세였을 때는 필름을 인화하러 오는 손님이 하루에 한명도 없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 소위 ‘동네 사진관’들이 많이들 사라졌죠. 제 주변에서도 사진관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는 동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하루 평균 두세명의 손님들이 필름을 인화하러 오는데 20~30대가 다수예요.” 서울 종로구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김희원씨의 말이다.

아날로그가 주는 여유로움

대학생 박희영씨가 요즘 듣고 있는 카세트테이프와 카세트 플레이어로 사용하는 소니 워크맨. 박희영 제공

서울 강북구에 사는 대학생 박희영(23)씨는 요즘 카세트테이프 모으기와 카세트 플레이어로 옛 노래 듣기에 푹 빠져 지낸다. 이오공감, 듀스 등 한국 가요와 백스트리트 보이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미국 팝송을 포함해 1990~2000년대 노래들을 많이 듣는다. 박씨가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1980~1990년대를 풍미한 소니 워크맨이다. 박씨는 2년 전 삼촌이 사용했던 워크맨을 우연히 발견했다. 삼촌이 낡아서 버릴까 하던 것을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서” 박씨가 가져오게 됐다. 이후 “음악도 잘 나오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 외출할 때 동행하는 필수 아이템”이 됐다. 카세트테이프를 모으기 시작한 지는 1년 남짓 됐다. 테이프는 100개 정도 모았다. 온라인 중고장터에서 사거나 서울 을지로, 종로 등의 음반 매장에서 구입한다.

원하는 음악을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편리하게 들을 수 있는 스트리밍 시대에 카세트테이프를 듣는다는 것이 불편해 보일 수도 있지만, 박씨는 카세트테이프를 아주 매력 있는 물건이라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곡을 그때그때 맞춰 듣기도 힘들고, 한곡이 끝나야 다른 곡을 들을 수 있는 그 불편함이 오히려 즐거워요. 빠르게 다른 음악으로 넘길 수도 없고, 때때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는 늘어져서 소리가 왜곡되어 나오기도 하는데 그게 묘한 의외성으로 느껴지고요. 늘 빠르게, 급하게 사는 삶만 추구하다가 카세트테이프를 되감고 있으면 일상 속의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실제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도 쉬는 날이 되면, 들었던 카세트테이프를 되감고 감상하는 일을 반복한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시간 낭비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주인공에겐 오히려 일상 속에서 고요하고 천천히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디지털 속도전이 대세가 된 현대인에게 아날로그가 주는 여유로움이 ‘셀프 힐링’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회사원 조진희씨가 보유하고 있는 진공관 앰프. 조진희 제공

회사원 조진희(37)씨는 진공관 앰프에 관심이 많다. 진공관 앰프와 빈티지 오디오의 조합은 오디오 마니아들의 꿈이다. 조씨는 지금 각각 약 100만원짜리 진공관 앰프 2개를 가지고 있다. 관리하기도, 다루기도 어렵지만 눈여겨본 진공관 앰프를 온라인 중고장터에서 찾아 다닌다. “오래된 전자제품은 특허 및 지식재산권이 없어서 회로도가 공개돼 있어요. 판매자들이 구로 전자부품 상가나 인터넷 등에서 부품을 사서 조립해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요. 판매자가 일일이 손으로 만든 수제품인 셈인데, 전세계 단 하나뿐인 ‘나만의 진공관 앰프’를 갖게 되는 거죠.” 조씨에게 진공관 앰프의 매력 포인트는 뭘까. “음향도 요즘 오디오 제품보다 뛰어난데다 특유의 디자인에서 오는 매력도 무시할 수 없어요. 오히려 요즘에는 세련되어 보이기도 해 인테리어로 제격이죠.”

서울 마포구에 사는 대학생 김준우(23)씨는 ‘지큐’(GQ) 등 1990~2000년대 남성 잡지들을 모으고 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김씨는 “그때의 잡지들을 보면서 ‘이때는 이런 것들이 유행했구나’라며 공감하는 재미가 있고, 시절마다 다른 패션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그는 같은 세대들이 즐기고 있는 뉴트로 문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뉴트로는 과거, 옛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 같아요. 예전 세대에게는 익숙한 물건들이 지금은 아주 낯설고 생소해 보이거든요. 디자인도 무척 훌륭한 물건들이 많고요.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복고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문물로 여겨집니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추억은 과거, 취향은 현재 진행형”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씨의 서울 서대문구 스튜디오에 진열돼 있는 엘피(LP)와 수집품들. 김씨는 엘피를 5~6천장가량 보유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41)씨는 자타공인 수집 전문가다. 엘피, 비디오, 디브이디(DVD), 시디(CD), 카세트테이프, 옛날 오락실의 오락기, 각종 잡지까지 그 종목도 다양하다. 수집의 시작은 15년 전 엘피였다. “음악을 사랑하고, 만질 수 있는 물성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 엘피는 시디보다 크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보기에도 좋다.” 이렇게 모은 엘피가 현재 5천~6천장가량 된다. 김씨에게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는 것은 일종의 기록이자 저장이다. “뭔가를 계속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물건을 수집하는 것이 아닌, 더 넓은 개념이죠. 그저 오래된 것을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에요.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이 물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는지 파악하고 구매하는 편입니다.” 그가 말하는 수집의 핵심은 추억이 아니라 취향이다. “추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취향은 현재 진행형이잖아요. 결국은 스스로가 행복하기 위해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김봉현씨가 자신이 수집한 만화책들이 진열된 책장 앞에 서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오래된 것도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이 뉴트로 열풍의 핵심이 아닐까. 일신우일신. 하루가 새로워지려면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이지만, 변해서 즐거운 것이 있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어 새롭게 여겨지는 것도 있다. 지금의 것이 늘 새로운 것이 아니듯, 과거의 것들은 낡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옛날에 향유하지 않았어도 지금 좋아질 수 있잖아요. 뉴트로는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현재의 취향입니다. 지금 즐기는 것이 정답 아닐까요?” 김봉현씨의 말이다.

백문영 자유기고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