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절연된 카자흐스탄 초원에서 자유를 맛봤다
톈산산맥의 고산지대 초원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하영지(여름 숙영지)가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중 카자흐스탄의 고원에서 유목민과 함께 생활하는 캠프가 6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열렸다. 지난달 말 5차 캠프에 참가한 필자가 전기도 없고 통신도 안 되는 오지에서 겪은 유목 여행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허당 칸’ 인류학자 공원국의 꿈
중앙아시아-한국 시민 연대 확장
수천년 이어온 유목의 삶 체험
잊었던 호연지기 해방감 충만
알마티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의 작은 마을 바이세트를 출발한 지 네 시간 남짓 지나자, 구릉지 초원 위에 하얀 유르트(이동식 천막)가 드문드문 나타났다. 신기했다. 누렇게 바싹 마른 풀들만 듬성듬성 나 있던 산 아래쪽과 달리 해발 2500미터에 이르는 고산지대의 능선과 계곡은 온통 푸른 융단이 깔려 있다. 가문비나무가 작은 숲을 이룬 언덕배기 몇 곳을 빼고는 전부 풀로 뒤덮여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섭씨 40도의 뜨거움, 자동차의 고장 난 에어컨과 창문으로 인한 괴로움, 오후 3시가 넘도록 텅 빈 뱃속에서 들리던 아우성 등 도중의 피로가 달아났다.
첩첩이 쌓인 계곡 중 하나의 끝자락쯤이 ‘2024 노마드(nomad) 캠프’장이다. 푸른색 배경의 한가운데 흰 점 두 개가 멀리서도 선명했다. 하나는 유목민의 유르트이고, 다른 하나가 우리 일행용 유르트다. 상품화한 유목 관광이나 오지 여행이 아니라 유목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살아보는 것을 목표로 삼은 노마드 캠프의 기지다웠다.
“자아를 벗고 대자연 느껴보세요”
톈산산맥 자락에 위치한 이 계곡의 사용자는 유목민 셀릭이다. 그는 7년째 이곳을 가축의 여름철 방목지인 하영지로 쓰고 있다.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하영지는 마을 단위로 카자흐스탄 정부가 무료로 배정한다. 셀릭은 올해도 지난 5월 초 전 재산인 소 30마리와 말 2마리를 데리고 산을 넘어왔다. 겨울이 오기 전 10월 말께 다시 산 아래 평야지대에 있는 동영지로 내려간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유목의 삶 그대로다.
셀릭의 여름 삶터에 노마드 캠프가 진을 칠 수 있었던 것은 기획자이자 총지휘자인 공원국 작가 덕분이다. 실속이나 계산에 어두운 그는 스스로 ‘허당 칸’이라 칭하지만, 일행은 경제적 실익이라곤 없는 캠프를 꾸리는 그를 전근대인 또는 그저 대장이라고 불렀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을 전공한 인류학자이기도 한 공 대장은 앞으로 5년 동안 계속될 노마드 캠프를 통해 중앙아시아 청년들과 한국 시민의 연대를 확장하려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런 공 대장을 수년 전부터 봐온 셀릭은 노마드 캠프에 자신의 속살과 곁을 내줬다. 살림집 유르트를 캠프 1차부터 6차(각 회 8박9일)까지 내내 여성용 숙소로 내주고, 자신은 낯선 방문객들과 섞여 잤다. 부인 카이샤가 만드는 중앙아시아 가정식을 매 끼니 제공했다. 카이샤가 소젖을 짜서 직접 만든 카이막(카이마크)은 인기 최고였다.
“조끼 등 안전장구를 갖추고, 유르트 앞으로 모이세요.”
도착 이튿날 난과 카이막으로 아침을 마치자, 공 대장이 일행을 소집했다. 말타기를 배울 시간이다. 문명세계에서 승마는 고급 취미나 귀족 스포츠이지만, 초원에서는 생활의 필수조건이다. 양 떼를 몰거나 흩어진 말과 소를 찾을 때, 혹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이웃에 갈 때 말이 없으면 안 된다. 일곱살 에도의 말타기 솜씨야말로 유목생활과 말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자기 키보다 갑절이 넘는 말을 타고, 이번 캠프를 위해 공 대장이 사거나 빌린 말들을 산에서 찾아 혼자서 능숙하게 데려왔다.
“말 한 마리와 개 한 마리는 유목의 최소 단위입니다. 그러면 양 400마리를 키울 수 있죠. 가축 수가 늘면 말도 늘어나고요. 비록 짧은 체험이지만, 말과 교감하면서 대자연을 한번 느껴보세요. 딱딱한 자아를 벗고, 문명세계에서 잊고 있었던 호연지기를 찾길 바랍니다.”
말 위에 비스듬히 앉은 공 대장은 승마 생초보 5명에게 말 타고 내리는 법과 떨어질 때 주의사항을 간단하게 시범을 보였다. 이어 “절 따라오세요”라며 계곡 아래쪽으로 말을 몰았다. 안장에 몸을 얹고 등자에 발을 겨우 끼웠지만, 공중에 솟은 내 몸은 말이 걸을 때마다 흔들흔들했다. 톈산산맥 대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대장을 따를 수밖에! 에도도 스스로 익혔다는데 우리라고 못 하랴.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만은 대범하고 의연해졌다.
다음날 두번째 승마 때는 초보자들도 말 위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정도로 자세가 안정됐다. 멀리 톈산산맥 꼭대기에 빛나는 만년설에 눈길을 보내는 여유도 생겼다. 아뿔싸! 긴장의 끈을 너무 풀어서일까. 일행 중 한 명이 트레킹 도중에 떨어졌다. 낙마 교육 덕분에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놀란 그를 이웃 유르트에 쉬게 하고, 나머지 일행은 시야가 탁 트인 계곡과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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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게 맡겼더니 서로 편해져
기수의 깜냥을 알아본다더니 내가 탄 말은 잘 가지도 않고, 겨우 가더라도 길 아닌 곳으로 지그재그로 나아갔다. 처음엔 빨리 가자고 재촉하거나 똑바로 가라고 제지하다가 나중에는 가능한 한 말이 하는 대로 뒀다. 속박됨이 없는 자유를 느끼고 싶어서 전기도 없고 통신도 안 되는 오지를 찾아왔는데, 말이라고 왜 자유와 자율을 추구하지 않겠는가. 과연 그랬다. 말에게 리드를 맡겼더니 말도 편안해했고, 말 위의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나흘째 오후에 동영지에서 올라온 2조와 교대하고 1조는 하영지를 떠나야 했다. 정든 셀릭네 식구와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특히 에도에게 마음이 갔다. 초등학교 시절 농활 왔다가 떠나는 대학생 형과 누나들을 보면서 어린 내가 느꼈던 쓸쓸함과 상실감이 떠올라서였다. 초등학교 1학년인 에도는 8월 말 개학에 맞춰 엄마와 함께 하산한다. 올여름의 시끌벅적했던 경험이 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길 바라면서 셸레크 인근의 동영지로 내려왔다.
낮에는 열기, 밤에는 모기가 들끓는 동영지에 와 보니, 소똥 말똥은 지천에 깔렸어도 모기 없이 긴팔옷과 얇은 패딩을 입고 지내야 했던 하영지가 천국이었음을 알겠다. 다행인 것은 낮에는 기온이 40도까지 오르지만, 해 지면 시원해지고 선풍기 없이도 유르트 속에는 열대야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영지처럼 전기와 수도가 없어서 샤워하려고 시내까지 왕복 3시간을 오가야 하고, 초원에 임시로 만든 천연 화장실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벗삼아야 했지만, 이른 아침과 해거름에 말과 함께 목초지를 거칠 것 없이 걷고 달리는 해방감은 문명세계에서 잊고 지냈던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김종철 전 한겨레 토요판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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