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4역'과 한동훈[기자수첩]
"다음 중 '당3역'에 해당하지 않는 직책을 고르시오."
한때 언론사 입사 시험 단골 문제 중 하나였던 문항이다. 상당수 수험생이 당 대표가 '당3역'에 해당한다고 보고 곧잘 이 문제를 틀리곤 했다. 각종 지식백과 사전이나 최신 시사상식 사전의 정치 부문 상단을 차지했던 '당3역'은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사무총장을 통칭하는 말이다. 정당에 갓 출입하는 막내기자에게 고참 선배들이 장난스레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가끔 '당3역'에 당 대표를 포함하는 막내가 있으면 "아직 출입할 때가 안 됐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연혁을 살펴보면 '당3역'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 총재 등 당을 대표하는 인물이 당권을 강력하게 틀어쥐고 '보스 정치'를 할 때 등장한 용어다. 소속 의원들을 통솔하는 반장 격인 원내총무와 조직 관리를 하는 사무총장, 당의 정책 파트를 전담하는 정책위의장과 별도로 당의 수뇌로서 총재가 존재했다. '당3역'이 당의 살림을 세 분야로 나눠서 꾸린다면 당 대표는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최고 실력자로서의 남다른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당 대표는 '당3역'과는 차별적인 존재다. 여당 당 대표의 무게감은 특히 더하다. 때론 대통령과 날을 세우며 한 진영의 어른으로서 또는 '미래 권력'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해 왔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당 대표이던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며 미래 권력으로 자리매김했고, 최근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국민에게 눈도장을 찍기도 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민주화 운동 선봉 중 한 명이었던 이해찬 전 대표부터 미래 권력으로 통했던 이낙연 전 대표와 이재명 현 대표까지 모두 '당3역'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체급을 보여줬고, 보여주고 있다. 당 대표가 임명하는 정책위의장·사무총장은 물론, 통상적으로는 원내대표 선출 과정에도 당 대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당4역'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그것도 국민의힘에만.
기존 3역에 당 대표까지 포함시킨 것으로, 친윤계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당선됐던 김기현 전 대표 체제부터 조금씩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를 놓고 한 정치학 교수는 "당 대표와 나머지 당 지도부 일원을 싸잡아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본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드문드문 기사에 쓰이던 '당4역'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건 최근이다. 이재명 대표와 양자 회담을 앞두고 채 상병 사건과, 관련 제3자 특검법에 대한 입장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한 대표와 원내 지도부가 회의를 하는데, 이 회의를 두고 '당4역 회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를 놓고 국민의힘 당직자는 "정말 어색한 표현"이라면서도 "비공개회의에서 당 대표가 원내대표를 압도하지 못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요즘 상황을 잘 보여주는 표현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첫 일성으로 제3자가 특검을 추천하는 채 상병 특검법 발의를 약속했다. 하지만 취임 한 달이 지나도록 발의는커녕 당내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개혁신당 천하람 원내대표는 한 대표를 향해 "국민의힘에서 (발의에 필요한) 10명을 모으기 어려우면 8명만 모아 오시라. 저희 개혁신당이 도와드리겠다"고 조롱하는 지경이다.
한 대표 측에서는 제3자 특검법 발의가 늦어지고 논의가 지지부진한 현 상황에 대해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표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버지 정당' 민주당과 달리 민주적인 정당이기 때문에 총의를 모으는 중"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한 대표가 결국 친윤계를 중심으로 한 내부의 반대를 뚫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당내 중론이다. 설령 친한계 의원이 제3자 특검법을 발의하더라도 나머지 의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한 대표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한다.
63%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취임한 한 대표. 한 달 만에 '미래 권력'으로서 입지를 다지기는커녕 법안 하나 마음대로 발의하지 못하면서 당의 실무를 총괄하는 간부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처지가 됐다. 졸지에 '당4역'이 되어버린 당 대표를 향해 당 내에서는 '착잡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 정당'과 다른 현대적인 정당의 모습이라기보다 총재 같은 대통령의 그림자가 여전히 이 정당에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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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박희원 기자 wontime@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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