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왕국' 다니엘 튜더 "의친왕·김란사에 궁금증 가졌으면"[조수원 BOOK북적]
[서울=뉴시스]조수원 기자 = "저는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미혼 여성만 받는다는 규정이 있어서 입학시켜 주지 않았지만 저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어느 날 저녁에 다시 교장 선생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선생님의 책상 위에 켜진 등불을 후- 끄면서 말했어요. 제 삶도 이렇게 암흑과 같다고요.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제게 빛을 볼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결국 교장 선생님도 마음을 바꾸었고 저는 최고의 학생이 되는 것으로 보답했습니다. 제게 낸시라는 이름을 지어준 분도 바로 그 교장 선생님이지요. 저는 다시 태어난 겁니다!"(272쪽)
김란사(낸시 하)는 1896년 기혼자라는 이유로 이화학당 입학에 거절당하자 교사를 설득해 입학을 허가받았다. 이후 일본과 미국 유학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19년 6월 파리강화회담에 의친왕을 파송할 비밀계획을 추진하다 고종의 승하로 실패하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베이징에 도착한 뒤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회에서 음식이 잘못돼 생을 마감했다.
"김란사는 한국의 여성 교육과 해방의 개척자 아닐까요?"
영국인 작가 다니엘 튜더가 한국의 숨겨진 독립 운동가를 조명하는 장편 소설 '마지막 왕국'은 의친왕(이강1877~1955)의 생애와 함께 김란사를 새롭게 기억하게 한다.
튜더는 김란사에 대해 "남편과 딸이 있는 기혼 여성이 미국에 가서 몇 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와 여성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 혁신에 참여한 인물"이라며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캐릭터로 만들었다"고 했다.
“한데…… 전하께서는 정말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십니까?” 낸시와 원식 둘 다 몸을 뒤로 젖혔고, 강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손짓까지 하며 열심히 말했다.“물론이오! 어떻게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자주독립을 이룬 민주국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일본도 없고, ‘폐하’나 ‘전하’로 불리는 사람도 없는 그런 국가 말입니다!”(378쪽)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낸시 하,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를 포기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YMCA에서 일하는 김원식. 그렇게 셋은 다시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그러던 중 엄귀인의 아들인 어린 영친왕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간다. 이강은 안중근의 총탄에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대신해 부임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총을 겨누지만, 총탄을 발사하진 못한 채 붙잡혀 가택연금을 당한다.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고 독자들이 ‘진짜’ 의친왕 이강, ‘진짜’ 김란사(낸시 하)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부당한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을 기억하게, 그리고 알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왕국'은 소설이지만 소재와 무게감이 예사롭지 않다.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의 일생을 그린 팩션 소설. 어머니의 죽음과 궁궐 밖 성장 등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정략결혼,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조선 총독 데라우치 암살시도 후 가택연금,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망명 시도 등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이미 힘을 잃은 조선 왕실의 비참한 상황을 이강의 시선으로 바라본 장편소설이다.
우리에게도 생소한 이름인 의친왕 이강. 그는 왜 왕세자인 순종이나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이 아니라 의친왕에 주목했을까?
"처음 의친왕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의친왕의 아들인 황실문화재단 이석 이사장을 통해서였다."
그는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삶과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의친왕의 삶을 재조명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했다"며 5년간 연구와 자료 조사에 매진해 집필을 완성했다고 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민주화, 고도성장 등 지난 100년 한국 역사의 상전벽해 속에서, 그 태풍 같은 바람에 묻혀 잊힌 문제적 인간 이강의 삶과,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울분을 토하고 또 욕망에 빠져 비틀거리기도 하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튜더는 "의친왕은 궁궐 밖에서 부모 없이 자라 트라우마를 가졌고 인생에서 친구와 연애 등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며 "의친왕의 삶에 조력자로서 도움을 주었던 아내 김수덕,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낸시 하)와 김규식(김원식) 등 격변의 시기를 주체적으로 살았던 인물들에게도 숨결을 불어넣고 싶었다"고 했다.
튜더는 영국 맨체스터 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경제학 철학을 공부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을 찾았다가 사랑에 빠져, 2004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현재 MBC 임현주 기자 남편이다. 그동안 미국계 증권회사와 한국의 증권회사에서 일했고 2010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이 되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7~2018년 청와대 해외언론비서관실 자문을 맡기도 했다.
튜더의 600쪽이 넘는 첫 장편소설이자 역사의 시간 속에 풍화된 한 인물의 비극적인 삶을 담은 이 책에 대해 '덕혜옹주' 저자인 권비영은 “두고두고 읽힐 소설이 될 거라 굳게 믿는다. 의친왕에 대한 그의 애정이 고맙고 소중하다"고 추천사를 썼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란 소년,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작은 나라의 불안한 시간을 생생하게 묘사한 소설은 사실과 허구 너머,이 땅에 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조선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전심을 다해 충성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견뎌낼 것이옵니다. 그게 하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 땅에 그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조선과 왕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왕실의 오누이 사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하옵니다. 그저 마마께옵서도 조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옵니다.”(118쪽)
☞공감언론 뉴시스 tide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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