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50년차 노년내과 의사의 조언 “인생 8할은 잊어도 좋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잊어라
몸 움직이고 호르몬 조절하면 저절로 ‘다정해져’
슬픔에 빠진 사람에겐 스테이크 대접해야
장 속에 뇌 있어… 달걀 먹고 스쿼트하라
환자 얘기 잘 들어주는 의사가 좋은 의사
도쿄의대 노년내과 의사 가마타 미노루 선생이 쓴 책 ‘적당히 잊어버려도 좋은 나이입니다’를 읽었다. 인생 후반을 위한 현실적 생활 조언이 가득해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릎을 쳤다. 몇 년 전 인터뷰 했던 니시나카 쓰토무 변호사의 ‘운을 읽는 변호사’의 두 번째 버전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1만 명의 의뢰인의 삶을 분석한 노 변호사가 ‘운의 좋고 나쁨은 도덕성이 결정한다’고 발견했듯이, 50년간 환자의 뱃속을 들여다본 75세 노 의사는 ‘몸과 마음의 건강은 근육의 힘과 망각 능력에 달려 있다’고 차근차근 증명해 낸다.
나이 들수록 친구는 없어도 괜찮다거나(동네 이웃들과 접점을 유지하는 걸로 충분하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잊고 달걀을 먹으라거나, 나이는 얼마든지 속여도 된다거나, 심지어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햇볕을 쬐고 자연을 가까이하면 호르몬 분비가 늘어나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유물론적’ 조언은 당장 실천하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몸을 움직이면 심장 박동도 올라가고 체온도 상승합니다. 체온이 올라가면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쾌감 호르몬인 도파민, 성장 호르몬 분비도 촉진되지요. 행복은 단순해요. 몸을 움직여 심박수를 올리면 되는 거죠.”
실제로 미노루 선생이 꾸준히 주도한 ‘애쓰지 않는 건강 장수 실천’ 캠페인으로 2022년 사가현 여성 건강 수명이 일본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허벅지 힘과 망각의 힘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이 관록의 의사를 이메일과 구술을 오가며 인터뷰했다.
-’적당히 잊어버려도 좋은 나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잊는다니, 무엇을요?
“저는 올해 76세, 아내는 74세입니다. 2남 2녀에, 손주는 넷입니다. 아내와 저는 둘이 생활하고 있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려놓고 깜빡깜빡 잊어버려서 가끔 실수합니다. 음식을 데우려고 전자레인지에 넣었는데, 식사가 끝나서야 거기에 음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거죠.
그럴 때 우리 둘은 서로를 비난하기보다는 ‘망각력이 대단하다’며 함께 웃어넘깁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잊어버려서 웃어넘길 수 있는 일들이 꽤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망각에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케임브리지 대학의 바바라 사하키안(Barbara Sahakian)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에 무려 3만 5천 번이나 결정을 내린다고 해요. 하나하나의 결정, 예를 들어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퇴근 후 마트에 가서 무엇을 살지 등등. 그런데 그런 선택은 하루가 지나면 거의 잊어요. 잊어야 살 수 있습니다. 잊어야 기억할 수 있지요. 인공지능은 인간의 이런 망각력을 흉내조차 못 낼 겁니다.
망각력을 높여가다 보면 지금까지 있었던 분노나 미움도, 혹은 방금 일어났던 화도 6초 만에 사라져요. 하룻밤 자고 나면 더 희미해지겠죠. 생각해 보면 잊는 힘 덕분에 여태껏 중요한 인간관계도 깨지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어요. 망각력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꿔준 거죠.”
-선생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잊으셨다고요. 정말 괜찮으신가요?
“한국 출신으로 프랑스에 입양된 한 여성 감독과 대담을 한 적이 있어요. 그가 묻더군요. 과거의 경험이 의사라는 직업에 어떻게 도움이 됐느냐고. 저는 원전 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에서 아이들을 구하는 활동을 104번이나 했고, 이라크 난민 캠프에 5개의 병원을 만들어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재는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아이와 엄마를 돕는 활동을 하고 있고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과거가 있지만, 양부모에게 거두어져 새 삶을 얻었기에 이제는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의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이혼하고 힘든 선택을 한 것 같아요. 모두들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친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합장하고 “어머니, 낳아줘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것은 제가 미움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잊으셨군요!
“친아버지는 저를 버렸어요. 그리고 어느 가난한 부부가 저를 데려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잣집 아들에 대한 부러움을 저는 양 부모님을 통해 잊을 수 있었어요. 잊는 힘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8할은 정말 잊어버려도 좋은 것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18살 때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양아버지는 “우리 집에는 돈이 없으니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를 설득했고, 아버지는 돈 대신 자유를 주겠다고 했어요. 수업료나 교과서 비용은 스스로 해결하라고요. 마지막에 한 가지만 약속을 하라고 하셨어요.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을 잊지 말아라.”
그 후로 저는 분노와 질투 같은 인생의 중요하지 않은 80퍼센트의 일은 잊어버리고, 20퍼센트의 중요한 일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요. 지금도 아버지가 말씀하신 ‘약자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려고 의료지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 20%만 기억하고 나머지 80%는 흘려보내도 좋다고 했다. 가족과 밥 한 끼 할 수 있는 시간, 산책할 수 있는 체력, 책이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럼에도 일을 해나가기 위한 ‘작업 기억력’은 중요하다고요. 말씀하신 두뇌 체조는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것인가요?
“워킹 메모리(working memory), 일본어로는 작업 기억이라고 합니다. 작업기억은 전전두엽에서 이뤄지는데, 이곳은 단기 기억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감정 조절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전두엽의 능력이 저하되면 화를 잘 내게 됩니다. 자주 화내는 노인은 전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졌을 확률이 높아요.
전전두엽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스쿼트를 한 청소년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을 비교해 보면 스쿼트를 한 그룹이 공부 성과가 높다는 결과도 있어요. 작업 기억을 위해서는 두뇌 체조를 권합니다. 1부터 숫자를 세면서 5의 배수가 나올 때마다 끝말잇기를 하는 겁니다. 1 2 3 4 오렌지, 6 7 8 9 지하철, 11 12 13 14 철학자 이렇게요.”
우왕좌왕 갈팡질팡으로 뇌에 리듬을 주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잘 잊는 것과 함께 이 관록의 의사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호르몬이다. 우리 몸과 마음은 결국 호르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
-50년 가까이 내과의사로 환자의 괴로움과 분노를 접해본 결과 ‘마음가짐을 바꾸려 애쓰는 것보다 호르몬을 조절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다른 의사들도 동의하나요?
“저는 호르몬 우월주의라고 하는데, 일본 내분비학회에서도 최근 사용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을 철학서나 자기계발서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쉽게 행동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분비하기 위해, 도전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하기 위해, 예를 들어 발뒤꿈치를 땅에서 들어 올려 떨어뜨리거나 햇볕을 쬐는 것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나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을 늘리기 위한 습관을 들이면 ‘좋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더군요.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짜증이 많아지고 의욕이 떨어지며 불면증에 걸리기 쉬워요. 가령 아이가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고 햇볕을 쬐지 않으면 세로토닌 분비가 저하되고 행복감도 감소하죠. 정신과에 가면 의사는 대개 세로토닌 약을 처방해 줍니다.
하지만 세로토닌은 체내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야채나 발효식품을 먹어 장내 환경을 개선하고, 햇볕을 쬐는 것이 더 좋습니다. 리드미컬하게 걸으며 ‘정말 맛있어’ ' 참 예쁘네’ 소리 내서 감동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다량의 세로토닌이 나오지요. 가벼운 증상의 우울증 환자는 이런 생활 개선만으로 치료할 수 있어요.
유대감 호르몬이라고도 불리는 옥시토신은 반려동물인 고양이나 개를 쓰다듬어 주면 분비됩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매우 강했다고 해요. 손자를 안아줄 때 삶의 힘을 얻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요. 이웃을 다정하게 대접하는 행동도 옥시토신에 영향을 미칩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더 젊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옥시토신의 영향이 큽니다.”
두 호르몬을 늘리는 습관만으로 타인에게도 나에게도 다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약이 아니라 생활 방식의 작은 변화가 삶의 질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놓을 거라고.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세로토닌이 뇌보다 장에서 더 많이 만들어진다는 게 사실인가요? ‘장이 제2의 뇌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에서 요즘 유행하는 ‘마이크로바이옴’과 생체네트워크 시스템을 생각했습니다. 뇌가 기뻐하는 생활, 장내 세균인 타인의 도움을 받는 생활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입니까?
“우리 몸의 70%가 넘는 면역세포가 장에 있습니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도 장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똑같은 생활을 해도 감기에 걸리는 사람과 감기에 걸리지 않는 사람, 자연 면역력의 차이가 나타나는 까닭은 장 건강의 영향이 큽니다. 장의 환경을 좋게 만들면 병에 잘 걸리지 않게 되고, 행복감도 높아집니다.
장이 좋아지면 뇌에 영향을 미쳐서 잠을 잘 자거나 인지기능이 더 나아진다는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장에 가장 좋은 습관은 버섯, 해조류, 채소, 김치, 낫토, 치즈 등 먹는 것에 신경 쓰는 생활입니다.”
-예전부터 허벅지 근육의 중요성은 강조하셨지요? 허벅지에는 신경 쓰는 반면, 콜레스테롤, 체중, 혈압 걱정은 신경을 끄라는 말은 어떤 의도에서 나왔습니까?
“허벅지 앞쪽 근육을 대퇴사두근이라고 합니다. 이 대퇴사두근은 인간의 근육 중 가장 큰 부피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마이오카인이라는 근육 작용성 물질이 나오면 혈압과 혈당을 낮춰줍니다. 저는 외래 진료를 볼 때 당뇨병 환자들에게 스쿼트 운동을 지도하고, 스쿼트 운동을 하면 혈당 수치가 정말 많이 내려갑니다. 혈압 조절도 잘 되는 분들도 많아요.
혈당이 높다고, 혈압이 높다고 바로 약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가 너무 높지 않다면 운동을 하면서 하루에 350g의 채소를 먹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비만이 큰 문제지만, 아시아 사람들은 서양처럼 BMI가 30이 넘는 고도비만은 많지 않습니다. 노인들은 조금 살이 찐 사람일수록 더 오래 삽니다.
콜레스테롤도 조금 높은 사람이 콜레스테롤이 낮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비만 패러독스나 콜레스테롤 패러독스라는 것도 최근 들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맛있는 것을 먹고 근육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의보다 나에게 좋은 의사를 찾으라는 조언에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가요?
“좋은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줍니다. 알기 쉬운 말로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약이나 검사보다 생활지도를 중요시합니다. 필요할 때는 전문의를 소개해 줍니다. 환자의 가족까지 생각해 줍니다. 다른 의사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환자의 희망에 흔쾌히 응해줍니다. 중병에 걸렸을 때도 숨기지 않고,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게 진실을 환자와 가족에게 잘 알려줍니다. 이 7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의 명문 의대를 졸업한 한 젊은 레지던트가 제가 있는 병원에 2년간의 레지던트 수련을 받으러 왔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돌보는 현장을 보고 배우고 싶다고요. 앞으로도 따뜻하고 능력 있는 의사들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지 많은 교수님과 논의하고 있습니다.”
가마타 미노루 선생은 지역 사회에서 유명한 의사다. 그가 장수 캠페인을 벌인 후, 사가현 여성 건강수명이 일본에서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는 뉴스는 오래도록 화제가 됐다. 50년 전에는 평균수명이 짧고 뇌졸중 환자도 많았던 나가노현도 미노루 선생이 의사로 부임한 후, 평균수명이 일본에서 가장 길어졌다.
뜬구름 잡지 않는 어른의 구체적 조언은 보통 사람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책에서 ‘마흔 넘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아들 때문에 괴롭다’는 고민 상담을 받고, 정답이 없는 문제를 다룰 때는 ‘재고조사’와 ‘보류’ 기법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재고조사는 꼼꼼한 현실 파악입니다. 자립을 가로막는 원인을 찾는 거죠. 하지만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미루어 두는 것도 좋습니다. 아들도 어떻게든 하고 싶어 할 것이고, 부모도 어떻게든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결국 서로 부딪히게 되지요.
일단 보류하고 아들이 맥주를 좋아한다면 함께 펍에 가거나, 축구를 좋아한다면 함께 경기를 보러 가세요.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태를 깨닫고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도 생깁니다.”
-한편, 재해 지역을 찾아가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스테이크를 대접한다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피해 지역에는 주먹밥이나 과자, 빵들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닭고기 꼬치나 스테이크 덮밥 같은 것이 나오면 다들 웃으며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아주 조금이면 충분합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도 하기 싫은 일이 반복될 때, 가족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면 조금 안도하고 조금 웃고 즐겁게 그 시간을 보냅니다. 웃음과 운동, 단백질 보충 같은 것이 살아가는 데 꽤 긴요한 기술입니다.”
-식도암을 앓던 72세 환자 유키오 씨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도 읽으면서 참 좋았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며 어떤 감정이 들었나요?
“유키오 씨는 가난했지만, 마지막에 수중에 남은 2만 엔(한화 18만 원)으로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완화 병동의 한 환자가 ‘죽기 전에 멜론을 먹고 싶다’고 했고, 병원에서는 유키오 씨가 기부한 그 돈으로 멜론 파티를 열었어요.
파티가 열리자 유키오 씨는 한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요. 자신이 하는 일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살아온 의미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힘든 삶이었지만 마지막 반전으로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죽어갔습니다.”
-키워주신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빗자루로 거리를 청소하셨다고요. 면도, 양치질, 거리 청소, 불꽃놀이를 보는 것… 죽기 전까지 좋은 루틴을 유지하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스스로 할 일을 하는 것이 마지막까지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셨고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을 청소는 아버지에게 삶의 보람이었던 것 같아요. 삶의 보람이 있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병이 있어도 아름답게 자기 인생의 막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의료비와 돌봄도 걱정이지만, 그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다음 세대에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선생님의 마음을 누구나 가질 수 있을까요? 사회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는 건 어떤 모습인가요?
“후쿠시마에서 혼자 살며 녹내장으로 두 눈 모두 실명하신 분이 제 강연회 때 오셨습니다. 자원봉사자가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주었지요. 그분은 결혼도 안 하셨고 아이도 없으셨어요. 죽기 전에 사는 집은 지역 장애인의 사회복귀를 위한 아파트로 개조해서 써달라고 하셨고, 가지고 있는 돈은 지역 복지법인에 기부했습니다. 그 돈으로 젊고 착한 생명들을 잘 살려주면 좋겠다는 것이 그분의 소망이었지요.
노년에 심부전증이 생겼는데 다음 세대를 생각해서 모든 준비도 다 마친 후, 추가 수술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정하시고 조용히 멋지게 가셨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함으로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누구나 몸속에는 거듭날 수 있는 시스템이 숨어 있다’고 하셨지요. ‘몸은 당신의 결단을 기다린다’고요. 확신합니까?
“그럼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내 인생도, 내 몸도, 내가 주인공이 되어 결정을 내리는 것을 기다립니다.”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우신가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응원하러 갈 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즐겁습니다. 겨울에 스키 탈 때도 즐거워요. 이제 몇 년 후면 더 이상 스키를 탈 수 없을 테니, 그 전에 열심히 근력을 다지고 좋아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려고 노력 중이지요.”
-마지막으로 ‘나이듦’을 염려하는 보통의 한국인들을 위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 백내장 수술도 했고, 귀가 조금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도 사용합니다. 수술 후에 다시 눈이 잘 보이고, 보청기로 귀도 잘 들리게 되면서 두려움이 없어졌죠.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활력이 생겼어요.
나이듦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빨리 찾아내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한국과 일본이 서로 친해지려는 마음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인들이 좀 더 활기차고 재밌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의사로 실질적인 조언을 해온 그가 책에서 좋은 환자의 조건으로 덧붙인 대목에서, 나는 포복절도했다. “아직 살아있는데 의사가 ‘임종하셨습니다’라고 하면 죽은 척해준다.”
의사의 실수를 잠시 눈감아주다 “나, 아직 안 죽었는데” 실눈을 뜨면, 놀란 가운데 병실이 웃음바다가 되지 않겠느냐고.
농담 속에 진실이 있었다. 환자도 가족도 의사도 쓸데없는 힘을 빼고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평온한 이별이 아니겠느냐고. 잘 잊고 잘 먹고 잘 걷고 잘 돕다가 마침내… 곁에 있으니 염려말라고 말해주는 좋은 의사 앞에서, 그런 역할을 하게 해주는 좋은 환자가 되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미노루 선생은 웃으며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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