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보급 55년, 우리의 빨래는 이렇게 진화했다

김지윤 기자 2024. 8. 2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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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의 진화와 배신, 그리고 미래

“매일 빨래를 하는 한국인 룸메이트가 신기하다.”

해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해당 글은 삽시간에 ‘얼마나 부지런해야 가능한 거지?’ ‘수건은 원래 일주일에 한 번씩 빨래하면 되는 것 아니야?’ 등의 댓글로 뒤덮였다. ‘한국에는 모든 가정에 세탁기가 있다’ ‘한국인들은 집을 지을 때부터 세탁기와 냉장고 자리를 계획해 집을 짓더라’ 등 자신의 목격담을 전하며 경이로움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 대다수 한국인은 이렇게 반응했다. “뭐가 문제이지?”

국내 최초 ‘백조’부터 세탁·건조 올인원 세탁기까지…빨래에 ‘진심’

지금이야 ‘1가구 1세탁기’가 익숙한 풍경이지만 흥미롭게도 한국 사회에서 세탁기가 ‘필수 가전’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제일기획이 발표한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행동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세탁기 보급률이 90%를 넘긴 시점은 1990년대 초반이다.

국내 최초 세탁기 타이틀을 거머쥔 제품은 1969년 금성사(현 LG전자)가 내놓은 ‘백조 세탁기(WP-181)’다. 당시 금성사는 일간지 광고를 통해 “빨래는 시간의 낭비다. 인력과 시간이 점점 부족해지는 현대 생활에 빨래는 세탁기에 맡겨두고 여유 있는 현대 가정을 가꿔보라”고 제안했다. 기대와 달리 ‘여유’는 모든 가정에 찾아오지 않았다. 비싼 가격 탓이었다. 더욱이 ‘빨래는 야무지게 비누를 칠해 비비고 주물러 빨아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1.8㎏의 용량으로, 그마저도 손수 탈수기로 옮겨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신문물’은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존재였다.

비운의 ‘백조’는 전국의 숱한 세탁소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애물단지’에서 ‘보물단지’로 위상이 변한 것은 경제발전에 따라 생활 수준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전기, 상수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다. 집 안에서 수돗물 사용이 자유로워지면서 세탁기 생산량은 1974년 기준 2만대를 넘어섰다.

주거 형태의 변화는 세탁기의 대중화를 견인했다.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빨래터의 기능을 대신하는 세탁실(베란다)의 역할이 커지며 세탁기는 ‘혼수 필수품’으로 떠올랐다. 세탁과 헹굼, 탈수 등 과정이 자동으로 진행되는 ‘전자동 세탁기’, 세탁판이 세탁통과 역방향으로 회전하는 ‘통돌이 세탁기’가 특히 인기였다.

양대 산맥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펼친 각축전은 기술력 향상으로 이어졌고 2000년대 이후 세탁기는 현대인의 생활 방식에 맞춰 진화하기 시작했다. 드럼 세탁기를 비롯해 절수, 절전 등의 키워드를 품은 친환경 지향 제품이 쏟아졌고 아이를 키우는 가정을 위한 ‘미니’ 세탁기도 개발됐다.

또 한 차례 지각 변동이 찾아온 건 팬데믹 이후다.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세탁기는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생활가전으로 변모했다. ‘백색가전’으로 통용되던 화이트 색상에 대한 선호도 역시 비비드한 컬러로 개성을 드러내는 삼성전자의 ‘비스포크’의 출시와 함께 조금씩 희석됐다.

현재 한국 세탁기 시장 키워드는 ‘프리미엄’이다. 업계에 따르면 인공지능(AI) 기술로 사용자의 불편함을 최소화한 세탁기가 주목받고 있다. 빨래 무게로 의류 재질을 판단해 세탁 강도를 결정하거나 세제 양을 조절해 투입하는 세탁기, 번거로운 이동 없이 세탁과 건조가 한 번에 가능한 ‘올인원 세탁·건조기’ 등이 대표적이다.

열일하는 세탁기에도…여성 가사노동 시간·강도 줄이기는 ‘글쎄’

급속도로 이뤄진 경제 성장 속에서 가전제품의 대중화는 때때로 여성들의 수고를 덜었다는 찬사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세탁기는 ‘가사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줌으로써 여성들의 노동 시장 진출을 촉진하고 이에 따라 사회 변혁을 일으키게 한’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는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우리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으로 인터넷이 아닌 세탁기를 꼽기도 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줄어든 시간이 근본적으로 노동의 강도를 낮췄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세탁기의 배신>의 저자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는 여성들이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남편과 아이들은 가전제품이 주부들의 가사노동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많은 빨랫감을 내놓고 더 다양한 음식을 요구했다. 미안한 감정도 느끼지 않고 당연한 듯 그랬다”면서 “세탁기는 여성을 해방하기는커녕, 주부들을 세탁일에서 벗어나게 하기는커녕, 더욱 세탁일에 매달리도록 했다”고 했다.

실제로 ‘빨래는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곳곳에 뿌리내린 광경은 미디어,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는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손목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만난 할아버지 의사의 말이다.

물론 모두의 생각은 아니다. 삼 형제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 조성호·이진영씨는 세탁이 얼마나 큰 힘을 들여야 하는 ‘그림자 노동’인지 알고 있다.

조씨는 “유난히 고온다습했던 지난 7월, 혼수로 들여 10년간 잘 사용해온 세탁기가 예고도 없이 멈췄다. 닷새 뒤 방문하겠다’는 수리 기사의 말에 ‘그 정도는 참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안일함을 곱씹어 후회하기 시작한 것은 ‘에러’ 버튼을 마주한 지 48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라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수리 후 세탁기에서 ‘띠리링’ 멜로디가 흘러나오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며 “이번 ‘빨래의 난’을 겪으며 세탁이 얼마나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노동인지, 보송하게 옷을 말리고 이를 개어 제자리를 넣는 과정은 또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깨달았다”고 전했다.

터치 한 번으로 찌든 때 ‘쏙쏙’
그림자 노동묵은 때는 아직

문명비평가 이반 일리치는 주부들의 가사노동을 ‘그림자 노동’(shadow works)으로 정의했다. 그는 “우리 사회는 돌봄이라는 핑계로 피해자 스스로 억압의 조력자가 되게끔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여성학자 김여진씨의 의견도 이와 일치한다. 김씨는 “흔히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세탁·건조기를 가리켜 ‘3대 이모님’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가 가사노동의 주체를 여성으로 국한해온 증거”라고 역설했다.

셀프무인 빨래방부터 빨래수거 서비스까지…미래의 세탁은 어디로

사전적으로 세탁은 옷 따위 섬유 제품의 더러움과 냄새 등을 제거하기 위해 깨끗이 씻고 헹구는 일을 의미한다. 인류는 의생활을 하면서부터 세탁을 해왔다. 역사를 품은 행위답게 세탁은 시대의 요구와 문화적 흐름을 반영한다.

세탁기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매일 같은 시각,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세에탁!’을 외치던 사장님들이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프랜차이즈 세탁소다. 동네마다 자리한 프랜차이즈 세탁소는 들쭉날쭉한 세탁 비용을 정찰제로 만들고 와이셔츠나 운동화와 같은 일상 세탁물을 흡수하며 ‘맞벌이 부부’의 방앗간으로 등극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과 1인 가구의 증가는 ‘셀프 무인 빨래방’의 경쟁력을 높였다. 24시간 운영으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갈 수 있고 이불과 같은 대형 빨래를 쉽게 세탁·건조할 수 있다는 강점은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MZ세대에게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카페를 겸하며 ‘놀이 공간’으로 이미지를 정착시킨 빨래방도 눈에 띈다.

코로나19의 비대면 문화와 ‘가심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의 만남은 과거의 수거 트렌드를 소환했다. 세탁물 정기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는 개그맨 이은지는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수건 같은 세탁물을 바깥에 내놓으면 (그 빨래가) 완성품으로 돌아온다”며 일명 ‘MZ세대 세탁법’을 소개했다. “빨래 개는 것이 너무 귀찮고 싫다”는 그의 호소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주부 최정란씨(75)는 “한파에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쥐어짜 널었던 빨래에 매달린 고드름을 떼어내던 시절, 세탁기는 부의 상징이었다”며 “살면서 이토록 다양한 세탁기를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음 세대 세탁기는 얼마나 더 똑똑할까”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미래의 세탁은 어떤 모습일까. 이우석 사회학자는 “과거의 세탁 방식에서 현대의 혁신적인 서비스로의 전환은 사회적·경제적 요인들이 맞물려 진화해온 결과다. 세탁이 단순히 옷을 깨끗이 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하면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 셈”이라며 “이런 흐름 속에서 앞으로도 세탁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며 우리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빨랫감

재밌는 세탁 TMI

한국인의 평균 세탁 시간은?

비대면 모바일 세탁 서비스 ‘런드리고’가 발표한 ‘2022 대한민국 세탁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세탁에 투자하는 시간은 주 평균 5.2시간이다. 세탁 시점에 대한 질문에는 ‘세탁 바구니가 어느 정도 차 있는 걸 보았을 때’(50.4%), ‘속옷·수건·의류 등 부족한 품목이 있을 때’(18.7%) 등의 답변이 이어졌다.

세탁기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기는?

‘다나와 리서치 데이터’에 따르면 세탁기는 일반적으로 웨딩 시즌인 봄과 가을철에 높은 판매량을 보인다. 필수 혼수 가전에 세탁기가 포함돼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2021년 7~8월 평년보다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기록적인 불볕더위로 인해 빨랫감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세탁기도 ‘거거익선’?

가전은 ‘거거익선(클수록 좋다)’이라는 암묵적 트렌드가 있다. 전문가들은 세탁기의 종류와 용량은 빨랫감의 양과 주기, 가족 수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조언한다. 1인 가구일 경우 10㎏ 이내 세탁기면 충분하다.

세제는 얼마나?

세탁은 크게 세제 성분에 의한 화학적 작용과 주무르거나 두드리는 것과 같은 물리적 작용으로 구분된다. 의류전문가 이소진씨는 “세제 봉지 겉면에 명시된 적정량을 사용하라”고 권한다. 우리나라 4인 가족 기준 1회 세탁 시 적정 세제량은 계량컵(뚜껑) 1컵이다. 이는 2010년 국가기술표준원이 소비자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통일한 수치로, 7㎏의 빨래가 가능한 양이다. 간혹 세제량과 세정력이 비례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잔류 세제가 피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드럼 세탁기의 경우 다람쥐 쳇바퀴처럼 생긴 드럼을 회전시켜 세탁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한 원리인 만큼 한 번 세탁기를 돌릴 때 최대 용량의 70%를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

‘돈세탁’의 어원은 어디서?

깔끔한 이미지와 달리 때때로 세탁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돈세탁, 신분 세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용어는 1920년대 미국 범죄자들이 불법 자금을 합법적인 돈처럼 보이게 하려고 세탁소를 이용해 합법적인 소득인 것처럼 회계를 조작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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