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한류 즐기는 중국, 바라만 보는 한국
최근 어느 주말 오후,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한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귀에 익숙한 노래와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10대 청소년 열댓 명이 20~30초에 한 번씩 바뀌는 한국 아이돌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기자가 지켜보는 동안 나온 노래만 수십 곡인데, 이들은 각 노래의 춤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것은 물론 한국어 가사까지 따라 불렀다. 관중들은 연신 감탄하며 함께 몸을 흔들었다.
한류 열풍이 중국에도 불고 있다. 중국 빅테크 직원들과 만날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 연예계 소식을 꿰고 있었고,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중국 최대 소셜미디어인 웨이보의 실시간 검색어에 한국 인기 연예인이나 드라마, 예능 관련 소식이 올라오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각종 한식도 인기다. 생활 속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기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면 대체로 호감을 보이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한다. 모두 한류 열풍 덕이다.
하지만 중국인이 즐기는 한류는 반쪽짜리다. 중국 정부가 여전히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을 적용하고 있다 보니 콘텐츠의 경우 대부분 불법 사이트를 통해 접할 수밖에 없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 이후 잠시 한한령 해제 기대감이 커지기도 했다. 서로의 문화 시장을 개방하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면서다. 이에 엔터주, 게임주에 드라마와 영화 등 콘텐츠주까지 국내 문화 영역 전반의 주가가 크게 들썩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계절이 지나도록 협상 관련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중국 정부의 불안감 탓이 크다. 자유분방함, 특히 정부 비판적 사고방식이 한국 문화를 통해 자국에 유입될 경우 사상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홍콩 배우 주윤발은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시나리오는 영화 당국의 여러 부서를 거쳐야 하고,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제작비 마련도 힘들다”고 토로한 바 있다. 자국 문화에도 엄격한 검열 잣대를 들이대는 중국 정부 입장에서 한국 문화를 정식 수입하는 것은 분명 골칫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도 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양국 간 관계 개선이 선행돼야 하지만, 현 정부의 대중 정책은 사실상 공백 상태나 다름없다. 사이가 좋아도 시장이 열릴지 장담할 수 없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중국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리 만무하다. 일각에서는 이미 국면 전환의 시기를 놓쳤다고 평가한다. 윤석열 정부 임기가 곧 반환점인 데다, 여당도 지난 4월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중국을 압박할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정부 초기부터 관계를 다지며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한국이 안일했다.
한국 경제를 견인하던 제조업이 한계를 보이면서 한류를 앞세운 문화 분야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를 위해선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발굴해야 할 텐데, 마침 14억 인구의 거대한 시장인 중국이 바로 옆에 있다. 심지어 여론도 한류에 우호적이다. 중국인들의 음성적으로 감상하는 영상물만 수익화해도 이미 반도체 산업을 뛰어넘은 K콘텐츠 매출이 어디까지 늘어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언제, 어떠한 계기로 중국 정부의 입장이 바뀔지 모를 일이다. 그때를 대비해 부지런히 준비하고, 우리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내비쳐야 한다. 이를 위해선 대통령, 나아가 국가 차원의 관심과 독려가 필요하다. 한류를 즐기는 중국인, 그리고 이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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