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미국 태클에 걸린 K원전 체코 수출
지난달 한국수력원자력이 24조원 규모의 체코 원전 수주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미국의 몽니에 후속 절차가 난항을 겪고 있다. 원전 수출 사상 최대 규모 계약을 앞두고 기대가 커지는 가운데,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한국형 원전이 자사의 원천 기술을 침해했다며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 차원의 협상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78년 결성된 원자력공급국그룹(NSG) 지침에 따라 우리나라는 원전을 해외에 수출할 때 원천 기술을 가진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동의를 받게 돼 있다. 첫 원전 수출인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수주 때는 문제없이 이 절차가 이뤄졌지만, 이번 체코 원전을 두고선 웨스팅하우스 측이 지식재산권 문제를 거론하며 동의를 거부하고 있고, 미국 에너지부도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문제”라며 발을 빼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23일 “이달 초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김동철 한전 사장, 황주호 한수원 사장 등으로 구성된 민관 대표단이 체코 원전 수주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을 찾아 미 에너지부 및 웨스팅하우스 고위 관계자와 접촉했지만 별 성과 없이 귀국했다”고 전했다. 내년 3월로 예정된 본계약까지 한수원 측과 웨스팅하우스 간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사상 최대 규모 원전 수출에 심각한 타격까지 우려되는 실정이다.
◇뭐가 문제인가
이달 초 산업부와 공기업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미국을 방문해 에너지부와 웨스팅하우스 관계자를 잇달아 만났다. 웨스팅하우스가 한국의 원전 수출을 막아달라며 소송 등을 이어가며 발목을 잡자 이를 해결하러 간 것이다. 앞서 웨스팅하우스는 2022년 10월 미국 법원에 한수원이 자사의 기술을 침해했다면서 “한수원이 원전을 수출하려면 미국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작년 9월 미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은 “원전 수출 통제권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에 있기 때문에 웨스팅하우스는 소송 자격이 없다”며 각하했지만, 다음 달 항소했고 현재 항소법원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웨스팅하우스는 고리 1호기 건설부터 국내 원전 사업에 참여하며 각종 원전 기술을 국내에 전수한 기업이다. 국내에서 건설한 원전 28기 가운데 18기가 웨스팅하우스 계열이고, 해외에 수출하는 한국형 원전의 기반도 웨스팅하우스 모델이다. 이렇다 보니 원천 기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웨스팅하우스가 한국형 원전의 해외 수출 때 미국 에너지부에 수출 신고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1995년부터 참여한 NSG 지침에 따르면 미국 원전에 기반을 둔 한국형 원전은 미국 에너지부의 수출 통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은 체코에 수출할 땐 신고만 하면 절차가 끝나지만, 지재권을 두고 분쟁 중인 웨스팅하우스가 신고 자체를 뒤로 미루면서 우리 정부와 한수원의 애를 타게 한다. 앞서 한수원은 2022년 11월 에너지부에 체코 원전 사업 입찰 관련 서류를 제출했지만, 작년 1월 에너지부가 “관련 규정에 따라 미국인 또는 미국 법인이 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며 이를 반려했다.
◇UAE 때는 문제없었는데… 속내는?
15년 전 UAE 바라카 원전 수주 당시에도 미국 정부의 절차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당시엔 한국형 원전의 기술 국산화 수준이 낮아 큰 문제가 없었다. 설비 제작을 맡은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일부 설비를 웨스팅하우스 측에 발주하면서 허가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당시 국산화가 되지 않았던 각종 설비는 웨스팅하우스에, 고가인 발전기 터빈 등은 웨스팅하우스의 최대 주주인 도시바에 주문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리가 원전 핵심 설비의 대부분을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유럽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원전 발주가 잇따르며 2050년까지 세계 원전 설비 규모가 현재의 2배로 커지는 상황에서 웨스팅하우스의 한국 견제가 심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종호 전 한수원 본부장은 “1997년 해외 수출을 위한 기술사용협정 체결 당시, 수출 통제 절차에 웨스팅하우스가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전했다.
이번 방문에서는 향후 한전과 한수원의 원전 수출 과정에서 협력하는 방안을 제안하며 웨스팅하우스 달래기에 나섰지만, 웨스팅하우스 측이 과도한 요구 조건을 내걸어 접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 설비 계약과 향후 원전 수주전에서 협력과 같은 과실을 노리며 숟가락을 얹는다는 분석이 나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체코에 이어 폴란드, 영국, 사우디, UAE 등에서 추가 원전 수주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전망은
미국의 몽니가 본계약 때까지 이어진다면 체코나 우리 양측 다 부담이 커진다. 체코는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하루라도 빨리 원전 건설에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미국 정부의 신고 절차를 거치지 않은 한국형 원전을 계약하기엔 지정학적인 우려가 크다. NSG에 가입된 우리나라도 핵 확산을 막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국제사회 절차를 무시하고 해외에 원전 수출하는 선례를 만들기 어렵다.
다만 70년 동맹인 두 나라가 결국엔 파국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미 국무부는 에너지부와 달리 동맹에 더 가치를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사실상 원천 기술만 가진 웨스팅하우스 입장에서는 한국과 관계를 건설적으로 풀어서 향후 세계 원전 시장에 도전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천기술만 보유 美웨스팅하우스
1886년 설립된 미국의 세계적인 원자력 기업. 1957년 현재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상업용 가압수형 원자로(PWR)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으며, 1978년 가동을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를 건설했다. 웨스팅하우스는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30년 이상 미국 내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되며 건설 노하우 등이 사실상 사라져 원천 기술만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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